[경제칼럼] 노근호 청주대학교 산학협력단장·충북산학융합본부 원장

쉽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

소재·부품산업 육성을 위한 향후 행보를 축약한 말이다. 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의 핵심소재 세 품목을 수출규제한데 이어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우대국가)에서 제외하면서 부각되었지만 국내 소재·부품산업은 오랫동안 취약성을 안고 있었다.

1983년 우리나라의 삼성전자가 반도체 D램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하자, 일본의 미쓰비시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라는 도발적인 보고서를 낸 바 있다. 그 이후 10년이 지난 1993년 미국 데이터퀘스트 사는 1992년 반도체시장을 분석하고 D램 분야의 세계 1위 메이커가 삼성이라는 통쾌한 결과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렇게 우리나라의 반도체산업은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나 유한한 자원을 가지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압축 성장을 해오는 동안 소재·부품산업의 대일본 의존도는 심화됐다. 이를 빗대 1989년 일본의 경제평론가 고무로 나오키는 저서 '한국의 붕괴'에서 가마우지 경제로 표현했다.

'가마우지 경제'란 우리나라 소재·부품산업의 대일본 의존도가 높아 한국 기업이 완제품을 수출해서 수익을 올리더라도 일본산 핵심 소재·부품을 써야하기 때문에 정작 실익은 일본이 챙기는 구조를 가리킨다. 허약한 실상에 대한 조롱 섞인 지적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우리나라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이번 사태가 심각한 것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경제 보복을 했다는 차원이 아니라는데 있다. 지금은 어떤 나라나 기업도 독자적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해 낼 수 없을 만큼 글로벌 가치사슬에 편입되어 있다. 국제적 공급망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분업과 협업의 세계경제 체제를 위협하는 무모한 결정을 한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를 '수출 심사 우대국가'에서 배제한 이유가 안보상 불신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변명에 불과하다. 한·일 양국은 상호 의존적인 경제구조다. 특히 글로벌 IT 밸류체인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국은 일본의 주요 소재·부품을 수입해 반도체·디스플레이를 생산하고 글로벌 기업들은 이를 토대로 스마트폰과 TV용 올레드 패널 등을 만들면서 세계 IT 산업 발전에 기여해왔다. 전 세계 공동번영을 위한 상호협력의 근간을 역사적·사법적 사안을 빌미로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이에 대해 정부와 지자체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소재·부품·장비산업의 일본 의존 탈피, 대·중소기업 협력체계 강화, 제조업 부활 등 정부의 역할 강화를 계획하고 있다. 지자체들은 일본 수출규제 대응 민·관 합동TF, 피해신고센터 또는 대책반, 수출유관기관 비상TF 등을 구성하면서 대응태세를 갖추고 있다.

노근호 청주대학교 산학취창업본부장
노근호 청주대학교 산학취창업본부장

현 상황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국제 간 분업에 대한 신뢰관계는 언제든지 훼손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치밀한 소재·부품·장비산업 육성으로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국산화와 수입선 다변화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1991년부터 소재·부품의 국산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렇지만 이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잔존하는 '가마우지 경제' 구조에서 시급히 탈피해야 한다.

일본 기업들이 독점 공급하고 있는 소재·부품·장비 분야에 겁 없이 도전하는 신진들을 양성하고 꾸준히 지원해야 한다. 21세기형 신기업가정신을 함양해야 한다. 수요처인 대기업과 산학연 협력을 통해 중소기업의 연구개발을 도와주는 '소재·부품·장비산업 생태계'를 공고히 해야 한다. 시작은 순조롭지 못할지라도 훗날 효과를 반드시 거둘 수 있도록 '후일지효(後日之效)'(세종실록 19년 8월 6일)의 교훈을 깊이 새겨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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