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순덕 수필가

삶에 지친 친구가 하소연을 하였다. 어디라도 좋으니 여행을 떠나자고 한다. 자신을 억누르는 주변의 일상에서 하루라도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맏딸이라는 이유로 고교 졸업 후 친정의 실제적인 가장 노릇에 이제는 지쳤다고도 한다,

늙고 병든 어머니 때문에 부딪혀야 하는 형제간의 갈등 또한 답답한 현실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고 했다.

"어쩌면 좋니. 차라리 이 꼴 저 꼴 보지 않고 일찍 돌아가셨으면 좋겠지만 삶에 대한 욕구가 대단하시네. 정신이 멀쩡하시니 당신이 어떤 병에 걸려 있는지를 말씀드리기도 어렵고…"

젊은 날에 혼자되어 맏딸을 남편 삼아 살아온 어머니의 삶을 알고 있는 딸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이라는 것도 친구는 알고 있었다.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지만 오래전 남동생에게 빌려준 사업 자금을 돌려받으려고 하면서부터 남매의 분쟁은 시작되었다. 어느 집안이건 형제간에 싸움이 시작되면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그 고통은 부모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잘 되면 내 덕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자식간 분쟁에 부모는 원망의 중앙에 서게 된다.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가만히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어설픈 충고는 그녀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창피하게 느껴질 정도로 남들이 한 번쯤은 다녀왔다는 그 흔한 해외여행조차 가본 적 없이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는 정말 지쳤다"라고 한다.

문득 지인이 들려준 말이 생각났다.

외국 사람이 본 우리나라 사람들의 세 가지 놀라운 특성이 있는데 그 첫째는 경제대국인 일본을 우습게 아는 것이 우리나라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외국에 나가서 외국법은 잘 지키면서도 국내에서는 법을 우습게 알고 잘 지키지 않는 것이 두 번째이고, 대한민국이 얼마나 잘 사는 나라인지를 우리나라 사람들만 모르는 것 같다는 것이 세 번째였다고 한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이겠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외국인 시선은 우리도 생각해 볼 문제였다. 아무튼, 해외여행은 못 가더라도 어디든 떠나고 싶다는 친구와 어렵게 일정을 맞춰 강원도 속초에 숙소를 예약하였다.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로 친구는 몹시 들떠 있었다. 나 또한 어떻게 하면 더 알차고 친구에게 힐링이 되는 여행이 될까 열심히 일정을 짰다.

김순덕 수필가
김순덕 수필가

여행을 떠나기 이틀 전, 친구는 무거운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중환자실로 실려갔다는 것이다. 간호사에게 부탁하여 아들에게 연락하니 아들은 딸에게 전화하라 하고 화가 난 딸은 아들에게 연락하라고 하니 중간에서 황당해하던 간호사에게 한소리 들었다고 한다. 방송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기막힌 이야기가 친구의 입을 통해서 들리니 한숨이 나왔다. 노령인구가 늘어나면서 이런 광경은 친구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고령화와 여러 사회적 요인과 맞물려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효를 기대할 수 없는 낀 세대가 되어버린 중년들은 노후도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나도 모르겠다고 큰소리치던 친구가 어머니의 곁을 지켜야겠다며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사람이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세월은 사람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씁쓸하게 떠 오른다.

친구야 복 받을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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