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성범 수필가

어느 시대나 세대간의 언어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우리는 은어(隱語)라고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은어란 어떤 계층이나 부류의 사람들이 자기네끼리만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할수 있다. 얼마전 우연히 언어 소통부재가 얼마나 당황스런 일을 가져왔는지 라디오 방송을 들고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사연인즉 손주가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는 것 같았다. 학교를 가려던 녀석은 '할머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할머니는 손주의 마음을 금방 알아차리고는 '응, 알지, 오늘 우리 귀여운 손주 녀석 생일날이지, 그렇지?'하니 듣고 있던 손주가 '역시 우리 할머니 최고'라며 '오늘 친구들과 같이 올 테니 생파 부탁드려요, 그리고 거기다 응, 생선이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알았지요?'하며 부탁를 한다. 할머니는 망설임없이 '그래, 알았어요, 염려말고 학교에 다녀오세요, 이 할미가 한상 잘 차려 놓을 테니 친구들도 많이 데리고 와요'하고 손주를 보낸다.

할머니는 굵은 생파 몇 단과 싱싱한 생선을 넉넉하게 사와서 여러 음식 특히 생파와 생선요리에 신경을 써서 생일상을 거나하게 차려 놓았다.

마침내 손주녀석과 친구들이 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손주녀석은 막상 차려놓은 생일상을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같이 온 친구들도 어리둥절하는 모양이었다. 참다못해 손주녀석이 '할머니, 웬 양파로 만든 음식이 이렇게 많어? 거기다 생선은 또 뭐야?'하며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짓곤 한다.

불평을 듣고 있던 할머니가 끝내 '애야, 네가 아침에 나가면서 부탁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싱싱한 생파와 생선을 사가지고 이렇게 준비했는데 왜 그래, 응?'하며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으셨다.

이성범 수필가
이성범 수필가

이 사연을 듣던 손주녀석은 울음을 터뜨리면서 '할머니,생파는 생일파티란 뜻이고요, 생선은 생일선물이라구요?'하며 원망스런 말투로 말한다. 그제서야 할머니가 슬며시 웃으시며 '애들아. 미안하구나. 너희들 말을 알아듣지 못했구나. 속 많이 상하지, 하지만 이 음식은 건강에 아주 좋은 거란다. 많이 먹고 즐겁게 놀다가 가. 내년에는 이 할미가 정말 생파와 생선을 잘 준비해 놓을 게. 내년에도 꼭 와야 한다, 알았지?'하며 그 자리를 겨우 모면했다는 사연이었다.

이를 듣던 나 역시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허전해진다. 아니 무겁다. 이처럼 세대간 언어차이로 인한 소통 부재로 황당한 일을 당했으니 말이다. 할머니 마음도, 손주녀석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만 문제는 나 중심의 사고가 뜻하지 않는 일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의심이 있으면 즉시 물어 봐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자존심이 상하고 부끄럽다는 생각 때문에 나 중심의 생각으로 일을 처리할때가 종종 있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했지만 결과적으로 상대방에게 흡족함을 주지 못한다. 마치 오늘과 같은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현대와 같은 급격한 변화속에서 언어조직 또한 다양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기에 신세대는 기성세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기성세대 또한 신세대에게 배우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오늘따라 논어 '공야장(公冶長)'편 '불치하문(不恥下問)'이 가슴을 저미어 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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