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作 덕동계곡
장영주 作 덕동계곡

아주 오래 전, 20여 명의 화우들과 함께 백운으로 들이 닥쳤다. 죽마고우 민병익 님이 싱끗 웃으며 기꺼이 덕동 계곡과 운학계곡으로 안내 해주었다. 일행은 탄성을 지르며 이름처럼 아름다운 두 계곡의 합수머리에서 이젤을 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수많은 학이 춤을 추듯이 구름이 내려앉더니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급히 다리 밑으로 옮겨 비를 피하다가 핑계 낌에 아예 불 피워 솥을 걸고 천렵을 했다. 그림과 이젤은 그만 멀리 사라져버리고 다리 밑에 둘러 앉아 배 두드리고 노래하며 자연을 흠뻑 마셨다. 흰 구름 동네의 맑디맑은 개울에 비 쏟아지는 소리가 상기도 낭자하다. 백운의 흰 구름밭 위로 치닫듯 박달재가 시작된다.

구슬픈 가사가 하염없이 굽이굽이 돌고 도는 박달재의 산세를 연상시키기 때문일까? 얼마 전만 해도 노래방 최고의 인기곡은 '울고 넘는 박달재'였다. 작사가 반야월 씨에 의해 하루 만에 급조된 못 다한 사랑이야기로 '금봉이'는 이광수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을 빌려 왔다. 정상에는 무수하게 많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조각품들이 전시 되어 관광객들의 헛웃음을 사고 있다. 박달재는 음기가 많은 산이니 양기를 보충해야 한다는 근거 없는 소리로 충청의 정신에 먹칠을 하고 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며 녹 쓸고 좀 먹은 민족의 혼인가? 지금은 차라리 박달재를 관통하는 터널이 뚫려 백운에서 제천까지 단숨에 직통하니 오히려 다행이다.

'팩트'는 이러하다. 1530년에 편찬 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박달재'의 바른 의미가 또렷이 적혀 있다. 국조 단군의 아버지 '환웅께서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고 하니 '박달'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신령스러운 곳이다. 실제로 박달재에서 시랑산 정상 쪽으로는 단군 비석이 있다. '정감록'에는 '제천과 충주에 있는 천등 산, 인등 산, 지등 산이 천하의 명당'이라고 밝히고 있으니 둘도 없는 보물 산임이 틀림없다. 우리말에서 박은 밝음이요 달은 음달, 양달처럼 땅을 뜻하니 박달재는 오히려 '양기를 듬뿍 품은 밝은 언덕'으로 단군 왕검의 천제를 지내던 영험한 산이요 전란 시에는 사람을 살리던 승지인 것이다.

'고려사'를 보자. 1216년, 몽골군에게 쫓긴 10만의 거란대군이 쳐들어온다. 빼앗긴 거란 땅 대신 고려를 빼앗기 위해 생사를 걸고 침범한 그들을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이 바로 이 박달재에서 격퇴했다. 장군의 맏아들은 전사하고 자신도 부상을 당한다. 장군은 1218년 거란군의 재침도 완전히 격멸하고 내부의 반란도 평정하는 등 큰 공을 세워 바람 앞의 촛불 같았던 나라를 구했다. 박달재 옛 도로 정상에는 김취려 장군의 웅장한 기마상이 서있어 뜻있는 이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박달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치열한 전투가 다반사로 일어났고 임진년 충주 탄금대에서는 신립 장군의 옥쇄가 있었다. 6·25동란에도 박달재를 타고 후퇴하던 북한군들과 국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전략적 요충지이다.

북동쪽으로 박달재를 넘으면 봉양의 공전리가 나오고 조선말 나라를 되찾자던 민초들의 최초의 무력항쟁의병 사령터인 자양영당이 엄숙하다. 길은 이어지고 제천의 주산 용두산 기슭에 자리한 아름다운 명당 미당리에 신령스러운 소나무들이 자리하고 있다. 바야흐로 하늘이 내려앉은 햇빛 가득한 도시 제천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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