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作 사인암에서
장영주 作 사인암에서

의림지 가는 길, 변전소 뒤의 작은 못에는 딱 소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한 그루, 두 그루 사라져가는 소나무들이 아쉬워 30년 전 '외솔'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림으로 남겨 참배하듯 가끔 찾아갔다. 어느 해, 그 외솔마저도 불타버렸다. 현장을 목격한 윤종섭 님(현 제천시 문화원장)과 당시 엄태영 시장의 뜻에 의해 가장 비슷한 모양의 소나무를 옮겨 심어 놓은 것이 지금의 '새 외솔'이다. 전통이 예술로 이어진 문화와 행정의 아름다운 캐미의 현장이다. 어느새 훌쩍 60년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한 갑자 전, 초등학생 때였지. 동무 '상백'님과 갑자기 의기투합해 금성의 누님 댁까지 걸어 간 적이 있다. 누님과 매형보다도 또래의 조카들이 더 보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 꼬불꼬불한 그 길이 30여리는 족히 됐을 것이다. 언제, 어딘지 모를 세월처럼 잠긴 물밑으로 동무와 함께 걷던 다정한 길이 아직 이어져 있겠지. 미소와 음악으로 말없이 고향을 지켜온 그의 얼굴에 이제는 '큰 바위 얼굴'이 겹쳐진다.

봉양(鳳陽)으로부터 이어진 충청의 길 끝자락에 단양(丹陽)이 나온다. 내게만 보이는 걸까? "봉황처럼 귀한 단전을 태양처럼 밝히라"는 한민족의 깊은 수행의 비밀스러운 뜻이 분명하다. 단양, 영월, 영춘, 정선의 산골짝에는 얼마 전만해도 삼삼오오 신선도를 닦던 수행도인들이 있었다. 그러기에 단양 팔경(도담 삼봉, 석문, 구담봉, 옥순봉,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은 신선이 거니는 청풍명월의 완결판이 된다.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맞추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큰 유학자 '삼봉 정도전'의 아호도 도담 삼봉에서 기인한다.

푸른 하늘 흰 구름, 노송이 무성하고 비취색의 장대한 절벽 사인암(舍人岩)과 운계천의 운선구곡(雲仙九曲)은 조형적으로도 무척 아름다워 사시사철 자주 화폭에 담는 곳이다. 사인은 왕의 비서격인 정4품 벼슬로 고려 말 단양출신 '역동 우탁(易東 禹倬)'선생이 거닐었다고 이름이 붙었다. 신선이 따로 없지. 좀 더 단양 쪽으로 향하면 영원한 봄날, 영춘(永春)이 나온다. 남한강 뱃길이 닿던 그 옛날엔 현감이 있던 큰 고을로 지금은 산 전체가 크고 작은 사찰로 가득한 구인사로 유명하다. 구인사는 중, 고, 대학 동창인 내 막역지우 진충호 님과의 인연도 깊은 곳이다.

영춘은 아내의 친정이기도 하다. 전기도 없던 때, 쉬는 들 산위에서 접시 같은 호랑이 눈빛이 흔들흔들 강물을 향해 내려오던 때, 큰 물난리를 겪은 때, 처음 만나 한 달 반 만에 결혼했다. 그러고는 모든 게 낯설을 신부와 살림은 팽개치고 때 묻지 않은 자연만 그린답시고 집 떠나기 일수이었다. 의림지, 영춘, 영월, 요선정, 법흥사, 주천 등을 돌며 노루꼬리 같은 작업에 모여앉아 밤새워 통음했다. 조카 원홍상 님과 그 친구들이 막걸리 통자 꽤나 짊어지고 다녔다. 모두 청풍명월의 DNA 덕분이다. 모두 60대 후반의 중후한 삶의 주인공들이 되셨으니 마냥 감사할 뿐이다.

서울과 외국에서의 칼끝 같은 화가의 삶속에서도 '청풍명월'은 늘 나의 에너지원이 됐다. 이제는 서울을 떠나 좋아하는 바다가 있는 충남도에 안착했으니 이 또한 충청의 인연이다. 낳고 키워주고 받아주신 충청의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겠나마는 맑고 푸른 기운 따라 한 바퀴 돌면서 인사를 드린다. 나무 한그루, 바위 한 무더기, 잊혀 진 얼굴들 모두가 지금의 나를 이룬 귀한 존재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야 철이 들었나 보다.

이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마지 하러 또다시 화구를 챙겨 길을 나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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