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희가 망명하고, 김운용 체제로 돌아선 대한태권도협회는 정부의 지원을 탄탄하게 받으며 국내 보급과 해외파견에 집중했다. 실제 태권도의 해외사범 진출은 1950년대부터 개인자격으로 진출한 이행웅과 이준구(준리) 등을 시작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정부의 공식적인 파견이 이루어졌다. 당시 태권도사범들은 정부에서 임명해 중앙정보부와 군, 외교부, 경찰 등의 힘을 얻어 미주, 유럽, 아프리카 오지 등에도 파견됐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는 국교가 없던 동유럽에도 파견돼 한국과의 수교에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정부파견은 대한태권도협회가 정부의 힘을 얻어 진행됐던 사업으로, 이에 대한 국제관계 등에서 ITF와 갈등이 있었다.

김운용 전총재
김운용 전총재

김운용은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국제태권도기구를 창립했다. 또한 그는 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인 국기원이 건립되면서 국기원과 세계태권도연맹까지 수장을 맡으며 행정단일화를 이루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태권도 해외보급에 힘을 얻었다.

1972년부터 1990년까지 외교부가 담당하면서 해외에 파견한 사범은 37개국 50여명에 이른다. 이외에도 개인이나 유학 등으로 파견된 사범들까지 포함하면 수백명에 이른다. 이러한 세계 진출은 현재 210개국이라는 올림픽종목에서도 가맹국이 많은 종목중 하나가 됐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이전 까지 국제활동은 ITF가 WTF보다 왕성했다. 최홍희의 망명이후 대거 해외로 진출한 최홍희계열 사범들이 있었고, 지금도 각국의 초기 원로 사범으로 태권도보급에 앞장섰으며, 지금도 원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태권도가 정식종목이 되면서 ITF계열의 많은 초기 사범들이 WTF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국제연맹간의 갈등속에서도 김운용은 태권도의 경기화에 집중한다. 그의 전략은 국제스포츠기구에서 인정받는 태권도로의 변신이었다. 경기시 몸을 보호할 수 있는 호구를 개발하고, 경기규칙을 만들어 국제사회에 알렸다. 또한 ITF와 차별화하기 위해 품새를 개발하고 명칭을 제정했다. 특히 미국에 3번 유학을 다녀온 영어실력으로 1973년부터 2004년까지 30년을 세계태권도연맹의 수장을 하면서 세계 태권도의 거물이 됐다. 그의 최대 업적은 태권도의 세계화 추진과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태권도를 국제스포츠계에 올려 놓은 것이다. 1986년부터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92년에는 IOC부위원장이 되기도 했다. 대한체육회장과 국제스포츠경기총연합회(GAISF) 회장에 이르기까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스포츠외교력을 발휘해 태권도뿐만 아니라 한국스포츠의 국제적인 위상도 올린 인물이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는 2005년 공금횡령 등으로 구속되면서 IOC위원 사퇴와 태권도계를 사퇴해 아쉬움을 남겼다.

최홍희는 중립국인 캐나다로 망명하면서 1973년 어렵게 영주권을 받았다. 그는 국제태권도시범단을 창설해 유럽을 순회했고, 1975년에는 박정희를 규탄하는 내용과 태권도를 방해하는 것에 대해 오타와 한국대사관에 이의제기를 하기도 했다. 결국은 반체제인사로 낙인이 찍혔고, 1978년부터는 WTF가 진출하지 않은 동유럽 공산국에 진출했다. 그리고 1980년에 태권도시범단을 결성해 북한을 방문하면서 태권도사범을 북한에 파견해 격술중심이던 북한의 태권도보급이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1980년대에 태권도는 이데올로기로 인한 태권도의 두갈래 보급이 이루어진다. 공산국가에는 ITF 태권도, 그 외 국가는 WTF태권도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갈래 태권도의 양상을 보이면서 최홍희는 태권도가 김운용 주도로 WTF가 창설됐고 박정희가 태권도를 개인의 정치도구로 이용당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WTF를 만들어 허위선전과 만행을 했다고 자서전에 썼으며, WTF성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 강했다. 그리고 최홍희는 경기화에도 부정적이었으며, 무도태권도가 태권도의 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세계태권도계에서는 ITF태권도를 무도태권도로, WTF태권도는 올림픽태권도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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