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순덕 수필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엿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들리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 내용이 유익한 것이라면 좋겠지만 경우에 따라 불쾌한 단어나 내용들이 들릴 때면 나도 모르게 말하는 사람을 다시 쳐다보게 된다.

"어제는 저녁 운동 끝나고 집으로 가는 곳에서 경찰이 음주운전 단속하던데 그쪽도 했어?"

"그래? 나도 저녁 늦게 들어갔지만 짭새는 못 봤는데"

헬스장에서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들의 대화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왔다. 육십은 훨씬 넘어 보였지만 '나이에 비해 자기 관리를 잘하는 멋진 사람들이구나'라는 생각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짭새'라는 비속어가 나오자 놀라서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었다. 그들에게 가졌던 좋은 인상이 교양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몇 년 전이었던가. 집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교차로 한편에서 큰 소리를 질러 대며 삿대질을 하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며 쳐다보니 앞에는 당황한 모습의 의경이 쩔쩔매고 있었다. '교통 법규를 지키지 않은 실랑이구나'라는 생각을 할 때 경악을 금치 못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삿대질을 하던 여자가 갑자기 의경의 뺨을 왕복으로 사정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억울하고 뭔가 잘못되었다고 해도 단속 중인 경찰의 따귀를 때리는 여자의 모습은 정당화될 수 없는 무식한 행동이었다. 대로변에서 대낮에 의경이 느꼈어야 할 수치심이 온몸으로 나에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의경은 병역 의무기간 동안 군 복무 대신 경찰의 업무를 보조하는 경찰이다. 만약에 그 가족이 우연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얼마나 분노에 치를 떨었겠는가. 신호에 밀려 그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하물며 그 젊은 경찰관은 대낮에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당한 치욕을 평생의 트라우마로 지니며 살 것이다.

아홉 살 때로 기억된다. 마을 사람들이 '독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그가 지나갈 때면 "독크 독크"하며 불렀고 심지어는 혀를 끌끌 차면서 다가오라는 손짓을 하곤 했다. 그러면 평소에는 순하던 그가 불같이 화를 내며 놀리는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곤 했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멀리서라도 그 사람이 보이면 다른 곳에 숨어서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독크'는 '개'를 의미하는 영어 낱말 'dog'였다.

김순덕 수필가
김순덕 수필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아이들은 들리는 대로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했던 것이다.

비어(卑語)는 상스럽고 거친 말로 보통 대상을 얕잡아 보고 사용하는 거친 말이다. '짭새'와 '견찰'이라는 오염된 언어로 불리는 경찰도 제복을 벗고 퇴근을 하고나면 한 집안의 소중한 가족이며 우리의 이웃이다.

맹자는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모욕한 뒤에 남을 모욕하며, 가정은 스스로 무너뜨린 뒤에 남이 무너뜨리며,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망할 짓을 한 후에 남이 멸망 시킨다'라고 하였다.

화합은 성취와 발전을 담보한다. 듣는 이에게 수치심과 파괴력을 유발하는 말은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자. 상대의 영혼을 갉아먹는 오염된 말을 잘못 사용하면 자신을 깍아 내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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