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다운 차란? 이를테면 녹차는 달콤한 배냇향이 입안에 가득하고 홍차는 그윽한 꽃향기가 벌처럼 너울대야 그 명분을 다 한다는 게지. 제아무리 융복합 문화가 곤두박질치는 시대라 해도 차에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짬뽕같이 붉으죽죽하고 들쩍지근한 차 국물로 조합해 마신다면 맑고 깊은 차의 본질을 폄하시키는 일 아니겠어.

그렇게 차를 마시며 버릇처럼 읊조리던 나의 신조가 한순간 무너지고 말았지. 물론 다우들도 동감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 그것들은 지금까지 내 안에서 나를 군림했던 기개나 절개와는 또 다른 의식을 주었지. 맑은 탕 속에서 무지갯빛 물감들이 아지랑이 피듯 엉켜 올라왔어. 마치 성숙한 여인의 옷자락이 뽀얀 찻잔 안에서 부드럽게 휘날리는 것 같았거든. 이렇게 황홀한 광경을 어느 누가 마다하겠어.

주인공은 당연히 차(茶)야. 차를 주재로 향신료, 꽃, 허브 등을 조합한 시쳇말로 '티 블랜딩'이라는 거야. 처음엔 성글지 못한 재료들이 품어낸 오합지졸의 복합체라고 생각했지. 새콤함과 짜릿함이 몹시도 간절한 어느 날, 조금 남은 홍차 부스러기와 히비스커스를 섞어 우렸는데 깜짝 놀랐어. 히비스커스의 핏빛 선혈이 홍차의 몸속으로 벌겋게 퍼져나가는 거야. 순간 난 무한한 세상을 보는 듯했어. 맛은 또 어떻고. 시큼하고 꿀쩍한 액체가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갔는데 참 이색적이더군. 동서양이 어울려 풀어낸 맛이랄까.

시대를 능가하는 예술의 맛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싶어. 수양과 정서적인 면을 고집하는 전통차와는 다른 분위기지만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차의 중요성은 같다고 봐. 또 약간은 자유분방한 느낌의 '티 블렌딩'이 부족한 우리 차 산업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다고 믿어. 하여 미숙한 실력이나마 마구마구 섞어보기로 했어.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흑과 백, 불과 물, 산과 바다, 나무와 열매, 꽃과 벌, 파랑과 빨강이 자아내는 무한함이 그 혼합물속에 존재하고 있었거든.

색, 향, 미가 천차만별이었지. 각각 다른 색과 그 비율의 세기는 광범위한 미지의 세계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일상생활 변화하는 우리의 삶 같았어. 가족, 부모, 스승, 친구가 살아가면서 엮어갈 미래, 사랑, 행복, 열정, 우정, 고통에 따른 색과 향기였지. 그것들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하나로 순화되는 자연의 순리였어. 묘한 것은 누구도 조화의 비율을 모르고 그 속에 담겨있는 진정한 행복을 모른다는 것이지. 달콤하고 싱그러운 순수 차의 감칠맛을 미치도록 좋아하지만 혼합물의 신비스러움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그때 깨달았어.

주로 티백을 만들어 마시는 간편 생활 차이다 보니 남녀노소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어. 그래서인지 세계 차 산업의 주류는 티백을 사용한 티 블랜딩이야. 문헌상엔 티 블랜딩 최초의 기원은 17세기 영국이라고 하지만 3세기 중국은 노엽(老葉)에 쌀을 섞어 고를 내어 마셨다고 해.(米膏出之) 물론 그전부터 솥에 차와 혼합물을 섞은 백비차(百沸茶)를 끓여 마셔왔고 그런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도 일찍이 차를 혼합해서 마셔왔지. 18세기 이운해의 '부풍향다보' 역시 그전 선조들의 블랜딩 기술의 지혜 아니겠어? 어쨌거나 지금 나는 블랜딩의 마력으로 에센스 형태의 향수나 약물, 심지어는 독약까지 창출했던 마술사의 심정이 되었다는 게지. / 국제차예절교육원장·다담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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