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난영 수필가

이완호 작품./ 이난영 수필가 소장품
이완호 작품./ 이난영 수필가 소장품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켜켜이 쌓인 세월 사이로 고향의 잔상이 아른거린다. 봄소식을 알리는 개나리, 진달래, 복사꽃이 아름답다. 맑고 고운 햇살, 밤하늘에 빛나는 별, 한여름 밤에 소리 없이 일렁이던 반딧불이, 멍석 위에 빨간 고추, 담장 위엔 탐스러운 호박이 매달려 있던 기억도 선명하다. 해 질 녘 굴뚝으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지붕 위엔 하얀 박꽃이 피어나던 고향 집, 꿈에도 잊을 수 없다.

고향이 그립다 보니 세월의 무게가 더해갈수록 시골 냄새가 나는 것이 좋다. 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이, 우아한 난(蘭)보다는 투박한 질그릇에 담긴 야생화가 정겹다. 애장품도 복사꽃이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유화와 고향 집을 그리워하며 만든 지점토 항아리이다.

내 고향은 2개 군, 3개 면의 경계에 있는 지금도 시내버스가 들어가지 않는 오지마을이다. 어린 시절 끼니 때우는 것이 어려워 입 하나 줄인다고,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남의 집 식모살이나 도시의 공장으로 아이들을 내모는 것을 자주 보았다.

하루하루 살기도 힘든데 아들도 아닌 딸인 내가 중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마른나무에 꽃이 필까 하면서도 복숭아꽃밭에만 가면 꿈과 희망이 차올랐다. 알 수 없는 섭리가 작용하는 것처럼.

꽤 큰 동네인데도 과일나무가 별로 없었다. 큰댁과 영자네 감나무와 앵두나무 외에는 우리 집이 전부였다. 우리 터앝 머리에는 과수원 하는 외가댁에서 가져다 심은 복숭아나무 몇 그루와 울안에 배나무도 한그루 있었다. 배는 매우 달고 맛있었는데 복숭아는 별맛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도 먹을 것이 귀한 시골에선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더욱이 봄이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피는 분홍색 복사꽃은 환상적이다 못해 몽환적이었다. 꽃이 필 때는 천상의 화원처럼 아름다워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주인공이 되는 복숭아꽃밭은 시나브로 어린 꼬마의 희망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중학교만 갈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는 청주로 유학(遊學)하면서까지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졸업 후 공무원이 되기까지 아버지가 심고 가꾼 복숭아밭, 아니 그 옆에 말없이 누워계시는 아버지의 보살핌이 있지 않았나 싶다.

세 살 때 하늘나라에 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아들 태몽도 복숭아였고, 무서우리만치 심한 입덧도 복숭아 앞에서는 주춤거렸다. 입덧이 어찌나 심한지 커피를 제외하고는 열 달 내내 거의 음식을 먹지 못했다. 아이 둘 낳는데 고막이 두 번 다 터지고, 빈혈로 입원할 정도로 입덧이 심했다. 그래도 복숭아는 입맛에 맞아 복숭아 철인 여름은 태교에 열중할 수 있었다.

발그스레한 빛깔의 크고 좋은 복숭아만 보면 사진 속 아버지 얼굴이 떠오르고, 아름다운 추억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복숭아꽃밭에서 무지갯빛 꿈과 희망을 키우던 모습, 친구들과 숨바꼭질하며 익지도 않은 풋복숭아로 허기진 배를 채우던 추억, 입덧이 심해 쓰러지다가도 자연이 만든 달콤한 맛과 향의 복숭아 한입 베어 물면 힘이 솟아났던 기억 등 지난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수구초심 때문일까. 중학교 입학하면서 떠나온 고향인데도 꿈을 꾸면 배경이 고향 집이다. 남편이나 직장동료는 그대로인데 무대배경은 고향 집이라니. 그런 데다 아버지가 심고 가꾸어 내 무지갯빛 인생 여정을 꿈꾸게 한 복숭아꽃밭에서 노니는 꿈을 꿀 때가 많다. 복숭아꽃밭에서 친구들과 둘러앉아 오순도순 소꿉장난하면서 재미있게 놀고 있는 어린 나를 보며 미소 짓기도 한다. 가난하지만 순박하고 심성들이 곱다.

세월이 흐르면 잊힐 때도 되었건만 향수병에 걸린 듯 고향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이 더욱더 깊어만 진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응접실에 커다란 복사꽃 그림을 걸기로 했다. 인사동을 대여섯 번 들락날락하다가 화가가 내 속을 들여다보고 그린 듯한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만났다.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부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게 마련이나 복사꽃 그림만은 영원히 내 마음을 사로잡을 것 같다.

흐드러지게 핀 복사꽃, 여울진 시냇물, 멀리 산과 마을이 보여 평화로움을 준다. 예술적 가치는 차치하고 복사꽃 그림을 보고 있으면, 편안한 마음에 미소까지 번진다. 아침저녁 복사꽃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힘이 솟는다. 삶이 힘들거나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듯 그림 앞에서 충분한 사유의 시간을 가진 후에 현명한 선택을 한다.

정겨운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순박한 시골 마을. 산자 수려한 경관도 없고, 마을을 대표할 수 있는 거목 하나 없는 야트막한 동산과 들판뿐이다. 다소 허허롭기는 했으나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가을 들녘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웠다. 그래도 고향 하면,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가 그리워서인지 지금은 흔적도 없는 아버지가 심은 몇 그루 안 되는 복숭아꽃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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