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장영주 화가·국학원 상임고문

정치권이 불통으로 반목하니 온 나라가 두 패거리로 나누어지고 있다.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국익에 반하지 말라." 면서 서로 국민을 팔고 있지만 우주보다 중한 국민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과 나라의 미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는 누가 봐도 의문이다. 이제 대한민국 지도자들의 불통과 소통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생사존망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통영 한산도에 있는 '제승당(制勝堂)'은 '승리를 제조하는 집'이란 의미이다. 본래 이곳은 이순신 장군의 서재인 '운주당(運籌堂)' 터였다. '운주'란 '지혜로 계책을 세운다'는 뜻이다. 최고 지휘관인 장수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장군, 고위 군관들과 나아가 병졸일지라도 군사와 전투에 좋은 지혜와 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언제나 출입하여 의견과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운주당의 모습이다.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웠다. 온갖 방책을 의논했다. 밤낮으로 의논하고 약속했다.' 그러나 운주당은 이순신 장군의 병법 책이 가득하고 그윽한 향불이 켜져 있는 서재가 아니다. 딱딱하게 격식이 차려진 회의장소도 아니었다. 그분의 서재는 집무실이자, 회의실이자 휴게실로 군무에 바쁘지 않으면 부하들과 바둑도 두고 술도 마셨다. 크게는 군사전략을 논했고, 작게는 부하들의 고충과 아이디어를 가감없이 들어 반영하면서 백성들의 삶을 격의없이 경청하신 공간이었다. 조선 수군의 앞길과 백성들의 생활, 임금과 나라의 안위를 밤낮을 걱정했던 진실한 지도자의 방이었다. 운주당은 항상 열려 있었고, 병사들도 찾아올 수 있는 개방공간이자 23전 23승을 잉태한 거룩한 곳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역모로 몰려 고문을 당하니 원균이 불패의 조선수군의 지휘관이 되고 운주당의 주인이 되었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의 기록이다. '처음에 원균(元均)이 한산도에 부임하고 나서 이순신이 시행하던 여러 규정을 모두 변경하고 그를 보좌하던 장수와 사졸들과 신임을 받던 사람들을 모두 다 쫓아버렸다. 특히 이영남은 자신이 전일 패전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므로 더욱 미워하였다. 원균은 애첩과 함께 운주당에 거처하면서, 이중 울타리로 운주당의 안팎을 막아버렸다. 여러 장군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또 술을 즐겨먹고서 날마다 술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며, 형벌을 쓰는 일에 법도가 없었다. 여러 장군들도 서로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으면서, 또한 원균이 두려워서 군사 일을 제대로 아뢰지 않게 되므로 그의 호령은 부하들에게 시행되지 않았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은 1597년 7월 15일 칠천량에서 일본수군에게 괴멸 당한다. 이로써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많은 장군들과 병졸들이 모두 수중고혼이 되어 버리고 남해와 서해는 일본 수군의 진격로가 되어 버렸다.

장영주 화가
장영주 화가·국학원 상임고문

그러나 이로부터 딱 2개월 후, 이순신 장군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기백으로 13척의 판옥선으로 133척의 왜 선단을 격파하시며 명량대첩으로 다시 '제승'하신다. 소통의 이순신 장군은 싸우기 전에 이미 이겼고, 불통의 원균은 이미 지고 있었다. 한민족의 일원이라면 아니 사람이라면 마음속에 꼭 '운주당'을 한 채씩 지어 진실로 소통하여야 할 일이다.

"하늘이시어, 둥근 달님이시어, 모든 이들이 소통즉생, 불통즉사의 마음으로 한민족과 인류가 결국 하나임을 깨닫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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