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제 효과' 안나타나

[중부매일 박성진 기자] 2살짜리 아들을 두고 가출한 아내에게 보복하기 위해 처제를 성폭행하고 무참히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해 유기한 이춘재(56·수감 중)가 법정 최고형인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것은 계획이 아닌 우발적 범행이라는 대법원 판단 때문이다.

이씨는 사건 발생 4개월 만인 1994년 5월 청주지법 형사합의부에서 살인, 강간, 사체유기 등의 혐의가 인정돼 검찰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1심 재판부는 "자신을 믿고 따른 처제를 성폭행한 뒤 살해하고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사체를 유기하는 등 죄질이 불량할 뿐 아니라 범행이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이뤄진 점과 뉘우침이 없는 점 등을 들어 도덕적이고 용서할 수 없다"며 사형 선고 이유를 밝혔다.

2심 재판부 역시 그해 9월 비슷한 취지로 이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1995년 1월 대법원 형사2부는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대법원은 "사형은 인간의 생명을 박탈하는 극형으로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 적용돼야 한다"면서 "피고인의 범죄가 반인륜적 행위임에는 틀림없으나 성폭행 이후의 살해까지 계획적으로 이뤄졌는지가 불분명하므로 충분한 심리로 의문점을 해소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원심은 피고인이 처제에게 수면제를 먹인 점으로 미뤄 계획적인 범행으로 인정했으나 살인범행을 사전에 계획한 것으로 볼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고 덧붙였다.

원심인 2심 재판부가 이씨를 사형에 처한 1심 판결을 유지한 것은 처제를 살해한 행위가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이뤄졌다고 판단했는데 반해 대법원은 성폭행을 저질렀다가 순간적인 상황의 변화로 살인죄까지 이어진 것으로 봤다.

그 논거로 처제가 성폭행을 당한 뒤 방 안에 쪼그려 앉아 울면서 이씨를 원망하자, 강간 범행이 알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가출한 아내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처제를 살해했다고 이씨가 인정한 점을 들었다.

강간 후 범행 발각이 두려워 살인까지 이어졌다면 계획이 아닌 우발적인 범죄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수면제의 양이 치사량 이상에 달했는지 여부도 중요한 판단 요소라고 지적했다.

치사량에 달하는 수면제를 먹여 항거능력이 없게 된 처제를 망치로 내려치고 목 졸라 살해했다면 잔혹한 계획적인 범죄로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음료수에 타 처제에 먹인 수면제 양이 치사량에 이르지 않고, 약효가 나타나지 않는 상태에서 강간한 뒤 반항하는 과정에서 살해했다면 당초 수면제를 먹었다는 이유만으로는 계획범죄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이후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사형 선고를 피하라는 대법원 취지에 따라 이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씨는 무기징역 선고에도 불복, 재차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이를 기각하고 파기환송심이 내린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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