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내 페이스북에 작년 오늘의 내 소식이 올라왔다. 평소엔 그냥 넘기곤 했는데 마음이 움직여 클릭했다. 자그맣던 사진이 좀더 커졌다. 강원도 횡성의 문학의 집에 거주할 때 찍은 사진으로 둥근 나무 밑둥에 잣껍질 두 개가 놓여 있다. 그때의 감각에 빨려드는 느낌 속에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생겨 페이스북에 써나갔다.

'다람쥐가 잣을 쪼개 먹은 흔적입니다. 거무스레한 밑둥 위에 인위적인 것이 있다면 전기톱날에 베인 단면 뿐입니다. 그 위에 다람쥐가 식사를 하며 만들어 놓은 두 조각의 잣껍질. 그 사이의 거리가 너무도 아름다워 눈을 떼지 못한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감미로운 현기증이 가슴에 피어 올랐습니다. 다람쥐 한 마리가 만들어놓은 미학에 감격하던 그 순간이 아련합니다. 저토록 아름다운 거리가 인간이 만든 문명, 도시, 문화 속에도 되도록 많이 반짝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대화만 하더라도 상대방이 하는 말 속에 깃든 아름다운 거리들을 무지와 방심, 오만의 가위로 싹둑싹둑 자르면서도 무엇을 한지도 모르는 행위들이 우리의 일상에 즐비하지요. 저급해서 말 꺼내기도 싫은 정치문화에선 끔찍할 정도로 심하고 그에 대한 우리의 담론들도 그와 닮은 폭력에서 아주 자유롭지는 않겠지요. 훌륭한 대화들도 물론 많을 거구요. 잊고 있던 소중한 소품 하나가 제 안에 멋진 직물을 짜나갑니다.'

답글이 올라왔다.

'나와 나, 나와 너, 나와 세계, 나와 시간. 그 사이의 거리. 본질이 드러나는 성스런 공간'

평소에도 감각과 사유가 깊은 페친이었다. 기분이 업되어 '거리에 대한 철학이 있으면 비리도 최소화, 난리도 최소화', 답글을 달았다. 거리의 '리'에서 연상된 퍼닝 즉 말장난이지만 뜻은 담겨 있었다. 조국 사태를 둘러싼 잡음들을 편가르기 시각을 넘어서 쓴 것이다.

거리는 물론 부정적인 것으로도 작용한다. 부모와 자식 사이가 멀어지고 사제간, 세대간, 지역간 거리 등이 우리 사회의 병폐이기도 하다. 거리에 대한 철학을 깊게 성찰하기엔 이 짧은 지면으론 부족하다. 철학자들이 평생을 바쳐도 못 다 밝힐 잉여가 나올지도 모른다.

거리를 적당히 두면 부패도 없고 통찰과 창조가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무아지경은 거리가 없는 것. 벽들의 무너짐. 거리의 증발. 그런데 니르바나는 거저 오는 게 아니다. 시타르타는 성채를 박차고 뛰쳐나왔고 아브라함은 고향을 버리고 떠났다. 진정한 거리만이 거리마저 붕괴시켜 무아지경, 적멸에 이른다. 이러한 철학도 없는채 서로 짜웅하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 사회. 우리가 남이가. 건배사나 외치고. 위기 시엔 서로가 서로를 배반, 사상누각인 것을.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행정, 입법, 사법, 언론. 민주주의의 기본 틀이자 4중주인 이 네 개 중에 작금의 우리나라는 적어도 아래 세 개가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강하다고 보인다. 순기능으로 돌리려 하기 보다 역기능에 안주하거나 그것을 강화시키려는 사람들 간의 불미한 협잡이 사회를 오염시킨다. 거리의 미학을 배우는 게 본인들에게도 결국은 좋을 것이다. 그런 답글도 달았다. 내 마음의 소리일 것이다. 성스러움까진 아니더라도 공감의 담론장은 될듯 했다. 마음에서 거리를 지운 남녀노소 선남선녀들이 달처럼 둥근 원을 그리면서 빙빙 도는 날. 사람과 사람 사이, 자연과 사람 사이, 신과 인간 사이의 거리마저 절로 소멸되는. 추석과의 거리가 좀 더 좁혀지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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