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최시선 수필가

수암화상(신미대사) 부도(보물 1416호)
수암화상(신미대사) 부도(보물 1416호)

한글 창제를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는 충격이었다. 지난 7월에 개봉하여 얼마 되지 않아 종영되고 말았지만 많은 의문을 던졌다. 이 영화 때문에 그 동안 해 오던 논어 공부를 멈추었다.

도대체 어떤 영화일까? 역사 왜곡 논란으로 많은 사람이 발길을 돌렸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세종대왕을 모독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종교적 불편함이다. 한글은 세종이 만든 걸로 아는데, 웬 승려가 등장하느냐 이거다. 포털에 들어가니 난리가 났다. 심한 욕설과 함께 비난이 가득하다. 이를 보며 왠지 슬펐다.

알아보기로 했다. 한글 창제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한글이란 말은 1910년대 주시경 선생이 쓰기 시작한 말이니, 정확하게는 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과연 세종 혼자 만들었을까? 기존 통설대로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함께 만들었을까? 아니면, 영화처럼 세종이 기획하고 신미가 도운 것일까?

미친 듯이 자료를 뒤지고, 관련된 책을 열 권 넘게 샀다.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재미,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가? 무엇보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궁금했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이 왼쪽 손에 들고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1940년에 발견되지 않았으면 한글 창제의 비밀은 미궁 속에 빠져들 뻔했다. 원본은 현재 서울 간송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에 얽힌 이야기는 다루지 않겠다. 이 책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고, 간송 전형필 선생의 노력이 매우 컸다. 난 요즘 이 해례본 공부를 위하여 매주 한 번씩 서울을 오가고 있다.

훈민정음은 과연 세종대왕 혼자 만들었을까? 영화의 모티브는 바로 이거다. 그 어려운 문자를 어떻게 임금 혼자 만들어? 많은 한글학자들은 세종이 혼자 만들었다는 친제설을 주장한다. 이것이 현재 정설이다. 영화는 여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아니야, 혼자 만들지 않았어. 누군가 숨은 조력자가 있어! 그게 바로 신미대사다.

신미대사, 언젠가 들어는 보았지만 영화에서 이렇게 다룰 줄은 몰랐다. 실록에는 세종 28년 5월 27일 갑오 2번째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여기서 소윤 정효강이 신미를 극찬한다. 실록에 의하면, 세종은 이때부터 신미를 알았으니 한글 창제와는 무관한 셈이다. 그런데 왜 한글 창제에 신미가 깊숙이 관여했다는 주장이 끊이질 않는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조선은 유자의 나라였다. 때문에 불교는 배척 대상이었다. 그러니 승려가 관여한다고 하면 엄청난 반대에 부딪칠 것은 뻔했다. 세종실록 1443년 12월 30일, "이 달에 친히 임금이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것이 전부다. 전후 사정이 없다. 세어보니 원본 한자가 달랑 57자다. 그 위대한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이렇게 간단히 기록할 수 있는가?

신미는 영산(충북 영동) 김씨로 영의정을 지낸 사대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김수성이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다가, 아버지 김훈이 유배형에 처해지자 속리산 복천사로 출가했다. 이후 학문에 정진하여 불경과 주역은 물론, 산스크리트어, 파스파 문자 등 5개 국어에 능통했다. 그의 친동생이자 집현전 학사인 김수온 쓴 '식우집' 복천사기에 의하면 세종이 신미를 불러서 만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세종은 유훈으로 신미에게 26자나 되는 긴 법호를 내린다. "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가 그것이다. 여기서 우국이세(佑國利世)란,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이다. 존자란 매우 존경할 만한 스승이란 뜻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다. 실제로 수양(세조)과 안평대군은 신미를 스승으로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나 언해본을 보면 곳곳에 불교의 법수가 박혀 있다. 깜짝 놀랄 일이다. 이건 다빈치 코드가 아니라, 한글 코드다. 3, 28, 33, 108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아는 '나랏말싸미 중국에 달라~'의 글자 수는 정확히 108자다. 어느 한글학자는 이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기획된 숫자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 불경 언해였다. 왜 그랬을까. 조선 백성의 정서는 아직 불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은 세종이 기획하고 신미가 도와서 이룩한 위대한 문자 혁명이 아닐까?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이 꽤나 있다. 아쉬운 점은 실록 그 어디에도 신미가 관여했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야사와 정황 상 그럴 수 있다고 추정할 뿐. 혹시 영화처럼 일부러 신미를 기록에서 뺀 건 아닐까?

배낭 하나 달랑 둘러메고 속리산 복천암에 올랐다. 신미대사의 부도를 부둥켜안고,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를, 유성룡은 징비록을 남겼는데, 왜 대사는 종이 한 쪼가리 남기지 않았습니까?"하고 물으니, 대사가 대답했다. "허허, 그게 바로 내가 살고, 훈민정음이 사는 길이었기 때문이지."

역사의 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세속을 여윈 속리산은 말이 없었다.

최시선 수필가 약력

최시선 수필가
최시선 수필가

▶2006년 월간 문예사조 수필 등단
▶CJB 청주방송 제5회 TV백일장 수필 장원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청주문인협회 부회장
▶저서 '청소년을 위한 명상 이야기', '학교로 간 붓다', '소똥 줍는 아이들', '내가 묻고 붓다가 답하다', 수필집 '삶을 일깨우는 풍경소리'
▶진천 광혜원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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