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들 / 임지은

필통에 코끼리를 넣고 다녔다
지퍼를 열었는데 코끼리가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이었다
오렌지였다

나는 덜 익은 오렌지를 밟고
노랗게 터져버렸다
가끔은 푸른 안개가 묻어 있어도 좋았다

이제 나는 오렌지가 어떤 세계의 날씨인지
알아내는 일에 빠졌다

박스째 진열된 과일 가게에 갔다
기다리는 건 잘 익은 바나나
지갑을 열고 거짓말을 꺼냈다
딸기였다

손바닥 위에 씨앗 코끼리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있는 분홍의 과즙
딸기 속에는 아주 작은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이제 거짓말이
어떤 세계의 바다인지 알아내는 일에 빠졌다
오렌지 속에 코끼리를 넣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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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일 시인.
최호일 시인.

동심이 깃들면 거짓말을 못 한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이 말은 거짓말이고, 거짓말을 더 잘한다. 상상의 세계가 마음껏 개입돼 제 입맛대로 펼쳐서 내놓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으면 경쾌한 상상력의 보법에 기가 막혀야 하는데, 오래전 유머인 냉장고에 코끼리를 쑤셔 넣는 방법이 생각나 나는 웃는다. / 최호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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