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규완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아무래도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가 시새움한 것 같다. 이른 새벽 찾아 온 복통은 응급실을 거쳐 급성맹장염 수술로 이어졌다. 한창 일하던 시절에 '맹장이라도 터져 병원에서 며칠 책보며 쉬었으면…' 하던 바람이 퇴직 후에 이루어졌다.

새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어하는 아내를 극구 만류했던 가장 큰 핑계가 집 옆에 들어서는 공공도서관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한참을 기다리던 지난 8월 28일 '청주금빛도서관' 개관일에 하릴없이 병원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계획대로라면, 좋은 일이 있는 날은 늘 그랬듯이 일찍 사우나를 다녀와서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도서관 문을 열자마자 테이프를 끊듯 들어가 찬찬히 둘러본 뒤,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도서관 개관기(開館記)'를 쓰는 것이었다.

'90대 노모는, 거의 장님이나 다름없는 70대 아들 보르헤스(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에게 밤마다 소리내어 책을 읽어주었다….'

퇴원 후에 먼저 찾은 도서관은 그 이름만큼이나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옥상에 올라 빙 돌아보니 10개나 되는 유·초·중·고교가 요기조기 서있고 불끈불끈 아파트들은 에워싸듯 숲을 이루었다. 지척에 국립청주박물관까지 있으니 공공도서관 자리치고 이보다 더 좋은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창덕궁 후원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 옆 언덕에 왕실도서관 규장각(奎章閣)의 문을 연 정조의 마음이 이러했으리라!

1736년 라트비아의 유대인 거리에서는 만약 책을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벌금을 물게하는 조례가 정해졌고, M.토케이어는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에서 '책은 비록 적이라고 해도 빌려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지식의 적이 된다'고 했다.

소설가 수전 손택은 "나는 책들로 내 하얀 마음에 물을 준다"고 말했고, 민주주의가 광장에서 싹텃듯이 인류의 행복과 미래는 도서관에서 움튼다고 할 수 있다.

세계에서 일곱번 째로 30-50클럽(국민소득 3만달러, 인구 5천만명 이상)에 가입했음에도 우리나라 공립도서관 수는 다른 나라에(3천~1만개) 훨씬 못미치는 1천여개에 불과하다.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주민들의 삶을 케어하는 역할과 기능을 하기에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조선시대 인재 양성을 위해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케 한 제도로 사가독서(賜暇讀書)가 있었다. '나의 사가독서'는 공로연수 기간이었다. 1년 동안 도서관에 살다시피하며 180권을 읽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찾고, 빌리고, 읽는 즐거움은 정말 대단하다. 도서관은 자유롭고, 차별없고, 배부른 곳이다. 開卷有益(개권유익, 책은 펼치기만 해도 유익하다)이라 했듯이, 開館有喜(개관유희, 도서관은 열기만 해도기쁘다)다.

아파트 단지에서 큰 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도서관이다. 옛날 동네 서당처럼 가깝고 친근하니 문턱이 닳도록 뻔질나게 드나들어야겠다. 게다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듯한 곳이 아니던가.

一生勤苦書千卷(일생근고서천권)이라. 한평생 근고(마음과 몸을 다하여 애씀)는 책 일천 권에 있다고 하였으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독 해야겠다.

책은 읽는 사람의 것이다. 청주금빛도서관! 놀이터같고 사랑방같은 참 좋은 도서관으로의 발전을 기대한다.

책 읽는 학생들을 보며 난국(亂國)의 시름을 잊는다.

김규완 충북중앙도서관장
김규완 충북중앙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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