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문학평론가

19세기에 들자 한국과 한국어에 관한 외국인들의 관심은 글로써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호머 베절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는 한글을 사랑하고 연구한 첫 번째 외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호머 베절릴 헐버트의 한국명은 헐벗 또는 흘법(訖法), 허흘법(許訖法), 할보(轄甫), 허할보(許轄甫)이다.

1884년 아이비리그의 하나인 다트먼트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유니언신학교에 들어가 2년간 수학했다. 고종 23년인 1886년 소학교 교사로 초청을 받고 내한(來韓)했다.

대한제국에서 감리교 선교사, 교육자, 한글 연구가, 항일운동가로 활약한 호머 베절릴 헐버트는 외국인으로서 한국인 보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더 사랑했다. 그는 1889년에 최초의 한글판 세계 지리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발간하여 육영공원 교재로 활용했다. 1896년에는 서재필·주시경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발간하고, 주시경과 함께 한글을 연구하면서 최초로 한글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했으며,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채보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글을 업신여기던 당시의 분위기에 통탄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논문을 발표하고 한글로 된 교과서를 발간하는 등 한글을 알리는 데에 힘썼다. 특히 한글의 우수성을 학술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논문 'A comparative grammar of the Korean language and the Dravidian language of India'(1905)를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한국어와 인도의 드라비다안 언어와의 비교를 통해 한국어와 드라비다어가 음운 및 어간, 명사의 성과 살림체계 등의 부분에서 많은 유사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 기원이 같다는 '남방기원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1906년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행위를 폭로하는 한편, 이듬해 고종에게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도록 건의하였다. 그는 고종 황제의 밀사로 임명돼 한국 대표보다 먼저 헤이그에 도착, '회의시보'에 대표단의 호소문을 소개하고 한일합병의 부당성과 일본의 만행을 폭로해 한국의 국권 회복운동에 적극 협력하였다.

이처럼 구한말 한국의 독립과 교육, 한글연구를 위해 혼신을 다했던 미국인 호머 베절릴 헐버트가 당시 높은 문맹률에 고심하던 중국에 한글사용을 제안했던 자료가 나왔다. 그의 이런 제안이 실제 중국에서 검토됐다는 정황도 제시됐다.

호머 베절릴 헐버트 한글의 우수성을 알아본 첫 번째 외국인으로서 한글의 과학화와 세계화에 공헌했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전문적으로 조사 연구하여 다수의 학술논문과 저서를 발간했다.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해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1999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글씨로 '호머 베절릴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묘비명이 새겨졌으며, 2014년에는 한글 발전에 대한 공로로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됐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2권), '대동기년(大東紀年)'(5권),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등이 있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문학평론가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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