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영희 수필가

지난여름은 그냥 가지 않았다. 가슴에 인두 자국 같은 문신을 새겨 놓았다. 문신이 요즈음 트렌드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헛것에 씌운 듯 가슴이 먹먹하다.

건들마가 불어오면 지난 더위는 다 잊기 마련이다. 그때는 너무 더워서 새로운 피서법에 두 귀가 쫑긋했었다. 우리나라보다 시원한 몽골의 초원에서 태곳적 그대로의 청정한 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피서가 될 것 같았다.

초원에서 별을 세고 여전사처럼 말을 타는 푸른 꿈으로 여행을 준비하며 더워서 늘어졌던 오감이 되살아났다. 여름에 추위를 대비해 패딩 점퍼를 준비하다니 그 자체로도 시원하지 않는가. 드디어 그날이 되고 우리 14명은 초록의 꿈을 안고 출발했다.

지인과 의자매 일 만큼 친한 여행사 대표가 김치를 비롯한 엄마표 반찬을 손수 해서 풍성한 식탁을 준비하고 날씨까지 좋았다. 귀국 전날 일정에 없던 마두금 연주를 감상하는데 영혼을 흔드는 슬픔이 밀려왔다. 호사다마의 전조였나 보다.

여행이 아무리 좋아도 내 집만 하랴는 귀소본능으로 꼭두새벽부터 분주했다. 아침을 기내식으로 해결했으면 좋았을 텐데 여행사 대표는 굳이 햄버거를 먹여 보내겠다고 KFC 매장으로 안내를 했다. 시계를 보니 그냥 가는 게 나을 듯한데 처음 온 나보다는 여행사에서 더 잘 알 테지 하고 따라간 게 화근이었다.

마침 젊은 사업가 앞에 앉게 되었다. 여기 창업자 커넬 샌더스가 본인 기술에 자금을 댈 수 있는 동업자를 찾아 1008회까지 실패하고 1009번째 성사를 시켰다고 성공신화를 전해 주었다. 힘든 사업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출국 검색대에 섰는데 공항 직원이 도리질을 하며 이 시간에 그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제지를 한다. 여행사 대표가 자기 능력을 다 동원하여 간신히 보딩 체크하는 데까지 도착했다. 아무도 없다. 이미 시간이 지난 것이다. 우리 항공기가 빤히 보이고 30분이 남았는데 찻잔 속의 태풍 같은 아우성뿐 탈 수가 없었다. 한참 후에 14명의 캐리어가 내려지는 것을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홍콩 사태로 보통 때보다 검색에 1시간 이상 더 걸린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울란바토르의 미아처럼 터덜터덜 공항을 빠져나왔다. 다음 비행기가 금방 있겠지 했는데 이튿날 상하이에서 출발하는 항공 표가 5매 있다고 했다. 칭따오에서 더 늦게 출발하는 항공 표 9매가 있어 여행팀이 나뉘었다.

초침 소리같이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내일은 1년에 한번 하는 수필문학 세미나 날이다. 질의자로 지정이 되어 출국하기 전에 원고를 보냈으니 벌써 인쇄가 다 되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한 시간이라도 빨리 가는 상하이로 신청을 했다. 상하이 가까운 푸동 공항에 착륙하여 많이 늦었어도 걱정을 잊은 채 짧은 숙면을 취했다. 새벽에 나갔더니 부부가 서로 떨어진 분이 발만 씻고 로비에서 새웠는데 가이드도 없고 타고 갈 차도 없다고 걱정을 한다. 여행사 대표를 깨워 통화를 하니 가이드가 나갈 것이고 그 안내로 공항버스를 타란다. 몇 번의 전화가 오가고 호텔 카운터 직원을 바꿔 주며 실랑이를 한끝에 다섯 명이 탈 수 있는 승합 차가 도착했다. 이왕이면 짐 부치는 곳에 세워주었으면 하고 기사한테 '헬로' 해도 반응이 없다. '웨이'하니 돌아본다. 궁하면 통한다고 손짓 발짓 다하여 의사를 관찰시켰다.

시간의 소중함을 코카콜라 더글러스 태프트 전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1년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입학시험에 떨어진 학생에게 물어보고, 1개월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미숙아를 인큐베이터에 넣은 산모에게 물어보라. 한 주의 소중함은 주간 편집장에게, 하루의 소중함은 아이가 다섯 딸린 근로자에게 물어보라. 한 시간의 소중함은 애인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1분의 소중함은 탈것을 놓친 사람에게 물어보라. 1초의 소중함은 교통사고를 모면해 운명이 바뀐 사람에게 물어 보라."라고.

시간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가는데 우리는 순간의 소중함을 잊고 산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데 과한 대접을 받은 탓으로 그 비싼 항공료를 더 부담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공짜는 없다.'라는 귀한 체험을 했으니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행사 전 도착을 감사해하면서도 몽골 초원의 슬픈 마두금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가슴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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