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
  • 중부매일
  • 승인 2019.10.17 10: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 오성진 농협이념중앙교육원 교수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1년, 독일은 소련(현재 러시아)과 맺은 불가침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했다. 당시 전선과 가까운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도 위기에 처했는데 소련군과 시민들은 2만5천㎞에 달하는 참호를 파며 독일군에 대항했다. 독일군의 포위로 물자 공급이 대폭 줄었고, 시민들은 톱밥에 인육까지 먹으며 저항하였다. 1944년 1월 27일 결국 독일군을 쫓아내면서 900여 일간의 항전은 시민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물론 지금도) 레닌그라드에는 소련 최대의 농업 작물 종자와 표본을 갖고 있던 바빌로프 식물산업연구소가 있었다. 연구소 과학자들은 굶주림과 독일의 계속되는 폭격에 맞서면서 종자와 표본을 목숨 걸고 지켰고 전후 소련 농업이 부흥할 수 있었던 초석이 되었다. 소련판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 이야기다.

예전에는 이렇게 소중히 보관한 씨앗을 뿌려 키우고 이중 제일 좋은 종자는 남겨서 다음 해 농사를 대비했다. 지금은 대부분 종자회사에서 나오는 종자를 구매하여 파종한다. 하지만 시판되는 종자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과학 기술로 일부 특성을 개량하여 만든 인위적인 종자이다. 그러다 보니 종자는 상품이 되었고 사업이 되었다. 특히, 종자의 상품성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작물들은 씨앗이 안 생기게 하거나, 간신히 맺은 씨앗을 뿌려도 원래보다 못한 작물이 나오게 개발되었다. 종자 개발에 많은 돈이 들어가게 되면서 종자 산업은 기업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몬산토(미국), 듀폰(미국), 신젠타(스위스), 바이엘(독일) 등과 같은 다국적 기업들이 탄생하였다. 우리나라의 다수 종자 기업들도 다국적 기업에 합병되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판매하는 많은 종자들이 외국기업 소유로 바뀌었다. 특히 양파는 국산 종자 자급률이 30% 내외로 추정되고, 청양고추도 소유권도 우리 것이 아니다. 감귤로 가면 더욱 심각해진다. 약 95%가 일본 품종이다. 2018년 12월, 일본이 우리나라에 감귤 신품종 5개에 대한 품종 보호를 출원하면서 이들 품종을 재배하던 농민들은 된서리를 맞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정부도 골든 시드(Golden Seed) 프로젝트 등을 통해 새로운 우수 종자를 육성·보급하여 해외로 유출되는 로얄티는 줄이고, 수출을 늘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 또한 산지 농업기술센터에서도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고 있는데 그중 잘 알려진 것이 딸기 품종 '설향'이다. 논산에서 개발된 설향은 기존 일본 품종인을 누르고 현재 딸기 시장의 약 80%를 차지하며 로얄티 유출을 막고 있는 일등 공신이다.

하지만 종자주권 수호는 정부와 기업만의 몫은 아니다. 일반인들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근래 도시농업이 많이 활성화되었는데, 아파트 내에서도 텃밭을 만들어 재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텃밭에 시판하는 종자가 아니라 우리가 먹어왔던 종자들을 내 텃밭에서 가꾼다면 다양한 종자들과 종자 주권을 지켜나가는 방법일 것이다.

10월에는 24절기 중 한로(寒露)와 상강(霜降)이 있다. 이 시기는 추수도 끝나 내년에 뿌릴 씨앗을 소중히 갈무리하는 때이기도 하다. 우리도 내년도 뿌릴 씨앗을 시판하는 공장제 상품이 아닌 예전 농부들이 죽기까지 보관한 토종 종자들로 준비하여 내년 텃밭 농사를 기약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오성진 농협이념중앙교육원 교수
오성진 농협이념중앙교육원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