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일칼럼] 최동일

우리 민속문화에 자주 등장하는 12지간(支干)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돼지는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했다. 사람들이 야생멧돼지를 길들이기 시작한 것이 약 5천년전이라고 하니 유구한 세월이 아닐 수 없다. 성질이 온순하고 식성이 좋은데다가 새끼도 많이 낳고 잘 자라 예나 지금이나 가축으로 선호되고 있다. 특히 단백질과 지방질이 많고 가공 방법도 다양해 지역과 인종을 넘어 전 세계인들의 먹을거리로 사랑받고 있다. 최근에는 집단 사육시설에서 길러지는 공장형 시스템으로 공급되면서 현대인 식탁에서 빠질 수 없는 품목이 됐다.

이같은 돼지가 요즘 수난시대를 맞고 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집단으로 죽어나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한달여 조금 넘는 사이에만 수십만마리가 희생을 당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이웃을 잘못만났거나, 태어난 시간과 장소 때문이다. 비극의 시작은 치사율 100%에 치료법도 없다는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다. 아직도 발생경로나 확산 원인을 알수 없는 이 병이 국내에 발생하자 인간들은 돼지를 잡는 것으로 병의 확산을 막고 있다. 사육돼지의 큰 형 격인 멧돼지도 화를 면하지 못했다. 감염경로로 가장 유력하다는 이유다.

국내에 서식하는, 그중에서도 경기북부, 강원북부를 비롯해 충남·북, 경북 등지의 야생멧돼지는 죽을 고비에 놓여 있다. 지금 살아있어도 산게 아니다. 유입원으로 추정되는 북한과의 접경지대에서는 모두 몰살당할 처지이며 충북에서도 절반은 시한부 목숨이다. 하기야 발생과 관계없는 곳의 사육돼지들도 예방적 차원에서 몰살당하는 판에 주인없는 야생멧돼지야 사지로 내몰린들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더구나 ASF로 신경이 곤두선 사람들의 주거지역으로 굶주린 멧돼지들이 뛰어들기가 다반사니 포획과 사살이 줄을 이을 판이다.

이처럼 야생멧돼지들이 몰살 위기에 이른 과정을 보면 전세계를 위협하는 ASF 만큼이나 돼지에 대한 인간들의 무지몽매를 탓해야 할 것 같다. 돼지를 기른지 반만년에 이르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모르는게 너무 많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중국을 거쳐 북한에서 ASF가 대거 발생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부 양돈농가들은 진작부터 야생멧돼지에 의한 남쪽 전파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에 대한 정부에 대비책을 요구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야생멧돼지 대책이 이뤄진 것은 일이 터지고 난뒤 한달여가 지나서다.

그렇다고 야생멧돼지를 탓할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집단사살에 나섰지만 아직도 멧돼지가 ASF의 매개체라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고 한다. 다만 야생의 멧돼지 폐사체에서 ASF 바이러스가 발견되면서 감염원이란 굴레를 쓰게 됐을 뿐이다. 경로 파악와 대책 마련에 국가적 역량이 총동원되고 있지만 자연 생태계의 오묘함 앞에 인간은 무력할 뿐이다. 하긴 ASF가 110여년전 아프리카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유럽을 거쳐 아시아까지 지속적으로 세력을 넓혔는데도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격리와 도살뿐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인류의 먹을거리에서 돼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지금의 ASF 공습은 큰 충격이다. 더 큰 문제는 구제역, AI(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 등의 사례처럼 현대인을 위협하는 가축전염병의 대부분은 인간들의 편의를 위한 집단, 밀식사육이 불러온 재앙이다. ASF 확산의 가장 큰 원인도 사람들의 생활과 직결된 잔반과 돈육, 부산물 등이다. 자연에서 비롯되기보다 운송수단, 대형농장 등 인간들에 의해 재앙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ASF의 선행지표랄 수 있는 돼지열병(CSF)이 이미 한반도에 세를 넓히는 상황에서 다른 형태의 열병 창궐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 돼지만 잡지 말고 이제서라도 인간의 욕심부터 잡아야 할 일인 것이다.

최동일 부국장겸 음성·괴산주재
최동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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