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건식의 무예이야기 - 일제강점기 최고의 씨름꾼은 김윤근
허건식의 무예이야기 - 일제강점기 최고의 씨름꾼은 김윤근
  • 중부매일
  • 승인 2019.10.31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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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5년 12월 18일자에 나온 김윤근
동아일보 1935년 12월 18일자에 나온 김윤근

씨름에서 '장사'라는 명칭에 익숙하지만, '장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할때도 있었다. 1930년대 조선의 씨름판을 이끈 당대 최고의 함흥출신의 씨름꾼 김윤근은 '장출장군'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가 25세이던 1935년까지 따낸 황소는 210여두, 우승컵 13개, 우승기가 88개나 됐다고 한다. 그가 은퇴를 하게 된 것은 연희전문학교를 1935년 졸업하면서다. 그러나 원래 이유는 김윤근이 출전할 경우 많은 선수들이 나오기를 꺼려했고 많은 신진 씨름꾼들이 유도와 권투선수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우승한 씨름대회는 200여회, 그리고 패한 것은 단 두 번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와 상대해 패한 사람은 1천700여명이었다고 하니 씨름 근대화이후 최고의 장사였음이 분명하다. 이를 두고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무적역사(無敵力士)'라고 불렀다.

그는 함흥영생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체조학교에 유학한 후 평양에서 직장을 다니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해 씨름을 했는데, 17세때부터 함남씨름선수권대회에 나아가 우승을 한 뒤 조선씨름협회 설립이후 전국대회부터 연희전문학교 소속으로 출전해 연승을 거듭했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왼씨름과 오른씨름 모두 우승을 해 '출장장군'이라는 칭호도 받았다. 그는 씨름뿐만 아니라 조선무도관의 강낙원사범으로부터 유도를 배워 무덕회 유도3단을 추천받았고, 권투에에서는 동양권투회에서 권투를 수련하기도 하였다. 그 후 김윤근은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 대한씨름협회 회장을 지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맡았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이 대동청년단을 방문했을 때 간부로 발탁돼 50만명을 지휘하게 됐다. 국민방위군이 창설돼 육군 준장 임명과 함께 단장을 맡았으나,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그를 포함한 간부 5명은 1951년 대구 근교에서 공개 총살됐다. 씨름계에서는 스타였으나,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역사에서 사라진 안타까운 씨름꾼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만들어진 국민방위군의 아픔도 잠시 이 대통령은 씨름에 1959년경 '천하장사씨름대회'라는 휘호를 하사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씨름원로인 김학웅씨가 저술한 '김학웅의 씨름이야기(민속원)'에 나온다. 하지만 공식적인 사료와 기록은 없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대한씨름협회와 한국일보사가 공동개최한 제1회 천하장사대회라는 이름으로 대회가 개최됐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 김기수(당시는 김해출신, 훗날 김천으로 소개됨)는 최초의 천하장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때부터 장군이라는 칭호에서 장사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해방이후에는 황주의 송병규, 사리원의 박진호, 대구의 김학룡, 김학웅, 김병철, 마산의 김성률 등이 있었다. 60년대 후반에 전남 함평의 지우상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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