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컵 / 김지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네가 옷을 벗고 돌아다녀
왼쪽 엉덩이 아래 멍은 가리기 좋은 위치인데
아래로 퍼지면서 희미해져
숨이 막혔던 그때처럼
믿음이 깨졌을 그때처럼

네 얼굴에선 물고기가 헤엄쳐 다녀
한 마리 아니고 세 마리
열두 마리
비린 물 냄새가 계속 피어난다
쪼그라든 젖꼭지에서
더 아래 습지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얼룩이 남아
닦아도 지워지지 않아
네가 옷을 입지 않고 돌아다녀
우리가 아는 모든 밤에

개처럼 짖지 않지만
개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가장 안전한 곳에서 묘연해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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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유리컵 안에서 발가벗겨지고 있다. 여자라는 단어는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데 '멍'이나 '젖꼭지', '습지', '얼룩' 이런 말들로 인해 짐작할 뿐이다. 그녀(들)의 몸에는 사회적 편견에 의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얼룩이 남아" 있다. 그것은 개처럼 이빨을 드러낸 다수에 의해, 아이러니하게도 유리컵 안에 든 것처럼 가장 안전한 곳에서 조금씩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물처럼 그 실체가 있거나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 최호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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