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어린 왕자
다시 읽는 어린 왕자
  • 중부매일
  • 승인 2019.11.07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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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조영의 수필가

가을이 깊어가면서 거실로 들어오는 햇살이 넓어졌다. 따뜻한 볕에 이끌려 앉으니 창틀 그림자가 먼저 누웠다. 베란다 안전망 그림자도 함께 와 있다. 촘촘한 세로 간격이 울타리처럼 되었다. 나는 스스로 그림자에 갇혀 늦가을 아침볕을 즐긴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그림자는 사라질 것이다. 그 동안 나는 행복한 죄인이다. 견고하고 굵은 쇠파이프 그림자를 허리에 감고 '어린 왕자'를 읽는다.

'한때 어린이었던 모든 어른이, 자신도 어린이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어린이가 자기들이 논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온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한다.' 옮긴 이의 말을, 투명한 햇살 사이사이에 올려놓고 생각에 잠긴다.

나는 어린왕자를 무척 좋아하고 잘 안다고 생각했다. 글을 쓴다거나 나를 포장할 때, 비유할 때 명대사를 적절하게 인용하여 상황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우렁이 새끼가 어미 살 파먹듯 나한테 이로운 문장만 찾았다. 그리고 지금, 다시 읽으니 새로운 감동으로 전율을 느낀다. 추수를 끝낸 논에서 벼이삭을 줍듯 빠져든다.

"네가 4시에 온다면 3시부터 마음이 설렐 거야. 누렇게 익어 금빛을 띤 보리를 보면 너를 생각하게 될 거야.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책임을 져야 해.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젊은 날 사랑과 사람의 관계에서 희망과 아름다운 문장만 보았다면,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네 장미꽃을 그렇게 소중하게 만든 것은 그 꽃을 위해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찾고 있는 것은 단 한 송이 장미꽃 속에서도, 아주 작은 물에서도 찾을 수 있어."

내 모습에서 나를 찾는 물음표가 되었다. 마음으로 찾아야 해. 가장 아픈 말이고 기억에 남는다. 바쁘다는 이유로 여유를 갖지 못하면서 왜 바쁜지 모르고 사는 내게 '어린 왕자'는 다시 말을 건다.

"모두 특급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기는 하지만, 자기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어. 그래서 어쩔 줄 모르고 빙빙 돌고 있는 거야."

베란다 안전망 그늘이 어깨까지 올라왔다. 나는 옥죄고 있는 그림자를 밟고 일어났다. 크림색 카펫 위로 그림자는 하나의 작품이 된다. 대충 아무렇게나 그린 상자를 보고 양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어린 왕자가 되어 그늘이 만든 작품을 바라본다. 작품은 곧 변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제목을 붙이고 싶어 고민 중이다.

어린 왕자가 찾아간 별에 사는 사람을 내가 다시 만난다.

내 존재를 인정받고 싶고, 앉은 자리에서 명령밖에 하는 게 없는 고립된 임금님. 늙은 쥐 한 마리가 움직이는 소리도 외로운 사람에게는 위로가 된다. 타인의 말은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가 듣고 싶은 칭찬만 들으려 하는 허영심 많은 사람. 부끄러움 때문에 같은 일만 반복하는 술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숫자만 세는 욕심 많은 사업가. 그는 진정성 없는 허상만 집착하느라 늘 바쁘다.

하나밖에 없는 가로등을 켜고 끄는 일을 하는 융통성 없는 사람. 내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동의 아집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 여섯 번째 별에서는 늙은 신사 지리학자를 만난다. 탐험가들의 이야기로만 기록하고 인정하는 편협한 생각으로 지리학 책을 만든다. 변하는 것이 두려워 고정불변만 고집하는 그가 추천하는 별은 덧없음이 반복되는 지구다.

어린 왕자가 별에서 만난 사람들은 지구에서 오늘을 살고 있다. 안전 불감증과 탁상공론으로 만연된 모순의 사회, 타인에 대한 배려는 없고 인정만 받고 싶은 배타적 외로움. 가진 것에 대한 집착과 끝없는 욕망. 'B-612' 별을 발견한 천문학자가 학회에서 입은 옷 때문에 믿어주지 않는다. 인정받기 위해 서양식 옷을 입게 만든 독재자도 본질보다는 겉모습에 집착하는 우리 모습이다.

조영의 수필
조영의 수필가

나는 언제 어린이었을까. 또 지금은 어떤 어른으로 살고 있는가? 치타와 표범의 차이를 찾아보는 수업에서 얼굴의 무늬로 알려주려는데 먼저 대답한 아이의 차이점은 눈물 자국이었다. 치타의 눈에서 입까지 내려온 검은색 무늬가, 눈물이 흘러 생긴 자국으로 본 것이다. 아이들과 있을 때, 조금은 순수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여전히 보아뱀이 삼킨 코끼리를 모자로 보는 갇힌 생각의 어른이다.

고향별을 떠나기 전 정성껏 청소하는 어린 왕자 마음으로 내 삶을 윤기 나게 닦으면 장미 한 송이 피어날까. 창문 너머로 가을빛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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