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출근길이면 차량이 많은 도심을 피해 오창으로 이어지는 미호 천변으로 핸들을 돌린다. 비포장 좁은 길은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던 길이 이제 새롭게 포장을 하고 한껏 제 품을 내어 주고 있다. 가을의 미호천은 수런대는 갈대와 억새가 흔들리는 바람으로부터 온다. 오전 8시쯤 1차선 포도 (包道) 위를 차로 달리다보면 수면 가까이 바짝 엎드린 우거진 수풀과 냇물이 아침 안개로 반쯤 잠겨있어 몽환적 분위기로 다가온다. 수십 년을 보이지 않게 성장하는 땅속 깊이 뿌리박은 나무와 내천의 힘줄은 뜨거운 태양도, 차가운 바람도 모두 껴안았다.

군데군데 버드나무가 풍경화의 단순함을 깨뜨리고, 백로가 먹이를 찾아 서성인다. 가식없이 자란 우거진 수풀이 가로막아 냇물에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눈을 멀리 둘수록 목가적인 풍경은 마음에 안정을 준다. 좀처럼 서두르는 법이 없는 천변은 바쁜 아침, 짧은 시간의 만남으로 하루를 계획하며 준비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안개가 걷히고 눈부신 햇살이 얼굴을 내미는 정오, 아침과 다른 오후의 천변은 또 다른 풍경으로 맞이한다. 맞은편 드넓은 들판에는 노란 계란 지단 같은 황금물결이 논바닥을 온통 뒤덮고 있다. 청주시를 반쯤 차지하는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흘러간다. 입을 모아 "후 후" 불면 사방으로 흩어질 것만 같다. 따끈한 햇살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 한정판 세일 같은 짧은 빛을 아쉬워하며 사람은 사람대로, 곡식은 곡식대로 쏟아지는 햇살에 에어 샤워를 하고 있다.

햇살이 발에 밟힌 저녁, 사람도 새들도 서둘러 제집을 찾아가는 길, 가까이에서 지는 저녁노을과 어우러진 산 그림자가 가슴속으로 살포시 스며든다. 퇴근길에 마주하는 이곳은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석양에 물들어 간다. 끝없이 이어지는 갈대밭은 석양빛에 반사되어 눈이 내리 듯이 은빛물결로 넘실거린다. 석양이 비추어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은빛 갈대는 노을과 진한 사랑에 빠진다. 지금 이 순간은 무엇이든 포용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대라도 옆에 있으면 손잡고 거닐고 싶다.

아쉬움에 길을 멈추고 천변의 황토빛깔 긴 의자에 앉아 꽃바람을 맞으며 부운 마음을 가라앉힌다. 말라붙은 찻잎 같았던 마음이 물에 띄운 듯 되 살아 난다. 길가에 드문드문 강태공이 세워놓은 차량들이 길을 좁히지만 그 어디에도 낚시꾼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한동안 넓고 긴 수풀언저리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내 속에 나를 만나는 시간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비록 높은 산과 바다와 같이 대 조망이 아니어도 감정의 크기는 천변의 너비와 비례하지 않는 만족스러운 저녁이다.

어릴 적 오빠와 함께 천변에 들어서면 달갑잖은 하루살이와 이름 모를 풀벌레와 우거진 수풀이 가로막을 때면 오빠가 앞길을 터주어 따라갔다. 보호자가 필요 없는 나이가 되어 호기로운 마음으로 들어서는 천변에는 더 많은 하루살이와 풀벌레와 가시 덩쿨에 도깨비바늘 씨앗까지 온 몸에 달라붙었다. 사는 것이 이러했다. 그래도 지금이 좋은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망중한에 빠져 있다 보니 마주보는 낮과 밤이 서로 대립되어 밝지도 어둡지도 아니한 천변은 점점 어둠속으로 고정되어 간다. 주위는 곧 어둠이 덮어버린다. 저 멀리 오창과 청주시내의 마천루의 불빛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김민정 수필가
김민정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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