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영희 수필가

안개가 온 세상을 포장한 듯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매일 보던 건물들이 요술 궁전인 듯 아슴푸레하다. 몽환적인 신의 작품을 어느 아티스트가 밤새 창문 너머에 설치한 듯 신비스럽다. 어느 이름난 화가의 그림보다 환상적인 은회색 풍경화에 순간 매료되었다.

어제까지 뒷동 건물 사이로 새로 짓는 회색빛 콘크리트 벽이 하루가 다르게 높이 들어차 시야를 가려왔다. 커튼을 내려 무신경하고 싶었으나 서재가 북향이어서 낮에도 불을 켜야 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저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이사를 갔더라면 했던 사고의 전환을 할 만큼 감미로운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안개는 대기에 수증기가 많이 있을 때 갑자기 온도가 내려가면서 수분이 응결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 댐 주위에 많이 발생한다. 운전을 하기 때문에 안개가 시야를 방해한다고 여겼지, 이렇게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리라고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라고 김승옥은 무진기행에서 말했다. 뜨거운 커피 잔을 들고 이제야 그 시각으로 은회색 풍경화를 보면서 무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아파트를 짓는 장소에 잠두봉이 있었다. 누에머리를 닮아 지어진 지명이다. 추위가 가시기 전 노란 개나리가 수줍은 듯 오솔길에서 초봄을 알려줬고 하얀 마거릿과 빨간 양귀비가 여름이 다가옴을 알려줬다. 가을이면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행인들의 발길을 붙들었다. 꽃이 피도록 받쳐 주는 초록의 동산은 바라만 봐도 힐링이 되고 동심으로 돌아가게 길라잡이를 했다.

동물 모양으로 향나무를 전지하고 솟대를 세워 놓는가 하면 계절에 맞는 온갖 꽃들을 한결같이 가꾸었다. 그렇게 종합 연출을 하는 분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늘 잠두봉에서 시작하여 구룡산까지 다녀오며 잠두봉을 가꾸는 분이 입구의 이름 없는 공방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의 찬사를 보냈다. 출렁다리와 조화를 이루는 꽃동산을 놓칠까 행인들이 내려서 정물화를 그리듯 스마트폰을 눌러댔다. 보는 사람도 뿌듯했다. 이런 아름다운 마을에 살고 있다는 자긍심이 자연스레 행복감으로 녹아들었다.

10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올 때 직장이 가깝기도 했지만 순수 자연 공간인 잠두봉을 가까이할 수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잠두봉 기슭이 한강 이남의 8대 명당 중 하나'라던 풍수지리학자의 말씀도 있었다.

공원 일몰제의 시효 만기가 다가와 개발이란 이름으로 어느 날 잠두봉은 두 동강 나버렸다. 파괴된 반쪽에선 공사로 인한 소음과 대형 차량의 통행에 비례해서 회색 콘크리트 벽이 높아만 갔다.

우리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살아갈 지구를 지키자는 환경단체와 사유 재산권을 오랫동안 침해당한 지주들의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주들은 등산로를 폐쇄하겠다고 맞섰다.

황희 정승이 종의 말도 맞고 부인 말씀도 맞는다고 했다는데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 일리가 있다. 한정된 예산이지만 시에서 사유재산을 보상해주고 녹지를 보존해주었으면 싶다. 미분양 아파트가 이 도시에만도 5만 호가 넘는다는데 왜 건설허가를 계속 내주는지 시민들은 알지 못한다.

청정했던 환경이 훼손되는 것이 마음 아프고 왜 진작 그 아름다움을 동영상에라도 담아놓지 못했나 하는 소시민적 아쉬움이 일었다. 잠시 빌려 쓰는 지구를 위해 무심히 안주만 했지 지구 환경 보존을 위해 무엇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동체적이고 사회 조직적 운동은 못 해도 지구에 부담을 주지 않는 생명체로 살아가고 있는지. 단지 나를 위한 공기정화 식물을 키우고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는 것 밖에는.

이영희 수필가<br>
이영희 수필가

어느새 여남은 볕에 환상 같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다. 은회색 풍경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콘크리트의 실체가 민낯을 드러냈다. 모든 존재는 내 인식 작용을 통해 오감으로 전달되어 뇌에 인지된다. 안개에 취하듯 한 시선을 곱게 물든 단풍으로 옮겨간다. 세상의 모든 물체는 실체가 없는 것이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경구가 떠오른다. 문리를 터득하지 못한 몽환적인 여자가 은회색 풍경화의 시각을 현실로 갈아 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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