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최동일 기자
  • 승인 2019.11.1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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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일 칼럼] 최동일 논설실장

요즘에 60세가 넘었다는 이유로 노인이라는 호칭을 쓴다면 거의 모두가 질색을 할 것이다. 하지만 국민연금법 등 정부가 정한 상당수 규정에는 60세 이상이면 노인이다. 법원이 육체노동 가동연한을 65세로 보는 판결을 내놓는 등 실제 생활과는 동떨어졌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다. 이에 정부에서 노인연령 기준을 올리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다만 일자리, 연금수급 등 논란 확산이 예상되자 정책에 따라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단다.

이처럼 노인연령을 높이려는 이유는 이에따른 비용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혜택 등에 따른 수명연장으로 불과 5년뒤면 전체 인구의 1/5이 65세를 넘길 것으로 예측된다. 생산가능인구는 급격히 주는 반면 노인이 급증하면서 노인복지 부담이 국가적으로 발등의 불이 된지 오래다. 하지만 나라살림을 맡았던 누구도 이를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되레 노인에 대한 현금복지 정책들이 하나둘씩 더 늘어났다. 특히 지금의 문재인정부가 그 끝판왕을 차지하고 있다.

정권들이 노인복지에 많은 공을 들인 것은 모두 표 때문이다. 인구비중이 커지고, 투표율이 다른 세대보다 월등히 높은 만큼 어느 정도의 선심성 정책이 불가피했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러는 사이 노인은 없고 표만 있는 나라가 됐다는 것이다. 진정 노인을 위한 정책은 찾을 수 없고 표를 노린 시책만 난무할 뿐이다. 이런 와중에 일자리 문제가 경제를 넘어 온 국민의 화두가 되자 일회성 노인일자리 정책이 쏟아진다. 돈 맛은 달콤하지만 땀이 없는 돈은 독약이다. 현금복지는 되돌리기 어렵다는 함정을 언제나 뒤끝으로 남긴다. '지금의 노인'만을 챙기다 보니 '다음의 노인'이 죽어나는 것이다. 결국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 셈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라는 표현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시에서 따온 말로 한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가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회자됐다. 그러나 제목과는 달리 이 영화에는 노인복지 등이 거론되거나 다뤄지지 않는다. 철학적인 표현과 스토리에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에 대한 얘기가 녹아져 있다는 게 평론가들의 얘기다. 그런데 그 얼개가 노인복지 등 지금 우리의 경제현실과 다르지 않다는게 놀라울 뿐이다.

과거의 어리석은 실수와 불확실하고 음울한 미래,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방관자적인 현재가 이 영화의 얼개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이 세개의 시각이 공존하면서 단 한번도 한 장면에 같이 섞여있는 경우가 없다. 정책의 출발과 진행, 결과가 늘 하나의 궤적에 있지만 인과관계속에 꼬리를 물며 연결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부는 나라의 곳간이 든든하다면서 '썩을 걱정'을 하는데 정작 빚은 계속 불어나고, 개선될 여지도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기회를 놓쳤다면 지금이라도 잘못을 끊어야지 방관만하다보면 불확실한 미래가 점점 공포로 구체화될 수 밖에 없다. 무능한 정권에 권력을 맡긴 잘못은 이제라도 제대로 된 인사 등용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오늘 당장 욕을 먹더라도, 짊어진 짐의 무게에 짓눌리더라도 내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 2년반 동안 한국경제를 허깨비로 만들었다. 소득주도성장, 주52시간근로 등 비현실적이고 충격적인 정책으로 인해 한국경제의 내실이 무너졌는데도 이에 대한 반성은 없다. 그럼에도 조국사태를 통해 드러났듯이 인사의 개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어리석은 실수는 '노인을 위한 나라를 없애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래가 없는 나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를 기대하는 영화속 마무리 장면이 우리의 현실보다 나아보이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최동일 논설실장
최동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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