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최승애 작가

2019청주공예비엔날레가 폐막했다. 비엔날레라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과 실험을 무대로 하는 미술행사다. 청주공예비엔날레는 전체적인 미술을 다루는 비엔날레가 아닐 뿐만 아니라 공예라는 콘셉트(concept) 단어 자체가 삽입돼 있어서 감독들에게 자유롭지 못한 부담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일반인식에 공예전시는 쓰임을 갖는 전통공예를 진열해 보여주어야 타탕하게 느낀다. 하지만 비엔날레는 일반 미술전람회가 아니다. 공예만 또는 전통공예만 구성했다면 이미 그 전시는 비엔날레도 아니고 담론이 형성될 수 없는 일반 공예 전람회다.

미술은 음악이나 영화처럼 직접적으로 인간의 감정이 모아지는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미술은 설명이 필요하고 개인의 선호도가 분명하게 자리한다. 그래서 전시란 것은 각자가 지닌 개인적인 선호도가 있겠지만 이번 청주공예비엔날레는 본 전시장 공사가 끝나지 않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변신에 성공하고 관람객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시했다.

예술감독은 몽유도원이라는 줄거리를 구성해 비엔날레의 형식과 내용을 제대로 갖추고자 노력했고 정북동토성과 같은 문화재와 연결하여 청주의 가치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예전에는 없던 전시 동선을 확산시켜 유수의 세계적인 비엔날레처럼 청주를 길게 스테이(stay)하게 전시 구성했다. 전시 동선과 전시 벽 하나하나에도 볼거리와 즐거움을 선보였다. 더불어 공예작품을 돋보이기 위해 회화작품을 간접적으로 희생시켜가며 전시 전체를 바라보는 연출을 보였다.

공예시장이 예전에 비해 내리막길을 걷는 현실 속에서 이번 비엔날레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그림 안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은유해 공예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채롭게 엉뚱하게 보이려고 했던 감독의 계획이 맞아 떨어져 흥행 현상을 가져다줬다. 관람객 입맛에 맞는 전시와 유익한 공간구도를 실행해 38만의 순수관람객이 전시를 구경했다는 것은 큰 흥행이다. 특히 예년에 비해 많은 외국 관람객이 일부러 청주까지 찾은 것은 물론 외국 미술전문가들의 호평이 잦았다.

현재는 융합적인 시대지만 과거에도 영역없이 융합적인 시스템으로 완성도를 높인 작가들이 많았다. 그 중 한명이 청주출신의 김복진이다. 이러한 청주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고자 지금까지 없었던 청주의 방을 열어가며 윤형근, 박노수를 비롯한 청주출신 작가를 동부창고에 기획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엔 총 18개 정도의 크고 작은 비엔날레가 성행한다. 사이즈, 역사성, 규모, 예산, 평가 등을 전체적으로 종합해보면 광주비엔날레, 청주공예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가 매머드(mammoth)급 비엔날레다. 이번 비엔날레 선전을 통해 청주공예비엔날레는 중부지역 문화메카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공예는 오랜 반복의 시간과 생활이다. 어쩌면 공예의 가치는 복잡하지 않고 간단한 미에서 느껴진다. 단순한 형태를 매우 현대적으로 표현하고 아담한 흰색으로 완벽한 고귀함을 표현한다.

공예의 시작과 생명은 자연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취지의 이번 비엔날레는 청주지역 자연을 벗 삼았고, 공예와 예술의 차이와 경계를 넘나들면서 '미래와 꿈의 공예-몽유도원이 펼쳐지다'라는 주제로 공예의 이상을 풀어내고자 한 흔적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번 청주공예비엔날레는 몽유도원이 꿈일지라도 미련 없이 현실로 돌아올 수 있도록 새로운 공예의 가치와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줬다 생각한다.



지난 20년이라는 세월동안 청주공예비엔날레를 바라본 공예인이라면 누구나 청주공예비엔날레의 문제점을 익히 알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청주공예비엔날레는 해결해야 할 문제점을 쉽게 풀어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공예비엔날레 전체 작품 수에서 85%를 공예가로 초대하고 나머지 작가는 공예 재료의 속성이나 몽유도원을 표출하는 작가들을 불러들였고

청주공예비엔날레를 기획한 안재영 예술감독은 크고 작게 다양한 비엔날레에 관여했고 꾸준하게 도예와 회화를 해온 미술가이자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론가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예를 오랫동안 다루며 공예의 논지를 파악하고 있는 공예평론가이다. 필자의 생각에 미술가들은 형상을 만들지만 정신적인 것이나 철학이 합류돼 예술이 완성된다고 본다.

필자가 오랫동안 미술 계에 머물고 있으면서 생각하건대 우리는 미술대학이라는 교명만 다르지 미술커리큘럼도 배우는 것도 거의 비슷하다. 한마디로 고등학교시절 착실하게 수능점수를 좀 잘 본 것뿐이지 어떤 대학을 나와도 그게 그거다. 필자가 세월이 가면서 예술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자그마한 공예마당에서 대학마다 파벌이 생기고 이익과 관계돼 적을 만들고 상대의 노력과 잘됨을 시기와 질투로 아파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며 영화, 연예, 음악 산업처럼 공예시장을 일으켜 세울 진정한 리더(leader)들이 필요한 시기로 본다.

한국의 공예는 한국만의 독특한 과거의 전통을 반영하면서 현대성을 갖추고 있고 심리적으로 아날로그적 쓰임을 갖는 것이 공예에 가깝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서로 대립되는 기술적이거나 문화적인 양태 둘을 모두 필요로 한다.

최승애 작가
최승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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