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눈] 김동우 YTN 충청본부장

12장이나 됐던 달력이 어제 같은데 벌써 달랑 한 장이 남아 달력으로의 존재 가치가 추락하고 있다. 한 장만 남은 것인지, 한 장이나 남은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올해가 다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오색의 화사함까지 뽐내던 단풍도 제 생명을 다하고 있다. 낙엽으로 추락하고 있다. 여기에다 바람마저 불어 이리저리 뒹굴어 을씨년스럽다. 차에 치이기도, 구둣발에 밝히기도, 하수구에 처박히는 등으로 추락은 비애감마저 제공한다. 소사(燒死)는 가을 냄새를 진하게 풍기니 그나마 낭만적이다. 여하튼 낙엽의 본질적 책무가 새 생명 잉태를 위한 밑거름인데 이러다가 그 책무를 다하겠는가? 걱정 아닌 걱정이다.

이때쯤이면 사람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조급하고 부산을 떤다. 별로 세운 계획도 없어 기대할 결과가 뻔히 없을 텐데 가는 세월을 붙들고 싶어 한다는 얘기다. 마치 철학자가 된 듯 우수에 졌기도 하고, 괜스레 계절적 우울증에 삐지기도 한다. 해가 바뀌면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돌돌이가 분명한데도 말이다.

해마다 송년회의 화젯거리는 '얼마 남지 않은 한 해 잘 마무리하고 새해에는 새롭게 시작하자.'가 단연 으뜸을 차지한다. 도대체 무엇을 마무리하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것인가? 설령 있다 하더라도 12월을 기준으로 정리하고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는가? 세월은 단절이 아닌 연속 선상에 있어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흐르는 강물을 단절 시켜 따로 구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이 과연 어떤 면에서 다른가? '11월과 12월 사이'와 '12월과 이듬해 1월 사이'가 양적이든 질적이든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달력은 그저 인간들이 한 해를 12개월로 나뉘어 놓고 월을 달리 호명(呼名)한 것에 불과하다. 기표(記標, 문자 그 자체)이지 기의(記意, 기표를 소리 내어 말한 것을 듣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개별적 개념)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해가 바뀌는 순간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며 해가 바뀌는 순간의 '12월과 1월'을 기의로 생각한다. 더욱이 한국이나 중국 등에서는 특정 12가지 동물을 빗대 해를 구분한 뒤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여하튼 12월이 되면 많은 사람은 가는 세월을 몹시 아쉬워하며 오는 세월을 무척이나 기대한다. 뭘 아쉬워하고 뭘 기대하는 것일까?

'기자불립 과자불행(企者不立 跨者不行)'이라 했다. '까치발을 뜨고 있으면 오래 서 있지 못하고 가랑이를 벌리고 걸어가면 멀리 가지 못한다.' 노자 도덕경 24장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욕심과 서두름을 경계한 말이다. 까치발을 뜨면 보다 빨리 더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래 서 있지 못해 결국 많은 것을 잃고 만다. 가랑이를 크게 벌려 걸어가면 몇 발짝 가지 못해 주저앉고 만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지는 꼴이다. 이는 마치 다리와 마음 사이의 시공간적 차이와 같다. 마음은 앞서 저만치 가 있지만 다리는 마음의 위치를 절대 따라가지 못해 뒤처진다. 이 같은 불일치의 결과는 고꾸라지는 것 이외 아무것도 없다. 모두 서두름과 욕심의 결과이다.

이의 해결책으로 노자가 내놓은 것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인위적인 것은 거짓이니 '스스로 그러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세월도 거스르거나 가불(假拂)해 쓸 대상이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서두름과 욕심은 결국 자연의 거스름이다.

'가는 해(년) 잡지 말고 오는 해(년) 막지 말라'했다. 가면 가는 대로 보내고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이런저런 미결 건과 해결되지 않은 고민거리를 잊겠다며 술 마시고 흥청망청하지 마라. 술잔에 구겨 넣지 말라는 얘기다. 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그냥 다음에 하면 된다. 해를 넘겨라. 좀 늦으면 어떤가? 세상에 죽고 살 일이 그리 많지 않다. 단지 죽고 사는 일을 스스로 만들 뿐이다.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을 핑계로 성찰적인 척하지 마라.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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