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보존 회의록 남기는 '지방의회 역사 기록자'

[중부매일 김미정 기자]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고, 기록은 미래를 향한 창(窓)이다. 지방의회 역사를 기록해 영구 보존한다는 사명감으로 일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충북도의회 속기사다. 속기사 역사는 60년 전 초대 제헌 국회에서 시작됐다. 충북도의회 속기사는 1991년 7월 1일 지방자지체 부활로 제4대 충북도의회 개원때 시작됐다. 이달 8일부터 43일간 열리는 제377회 정례회로 바쁜 충북도의회 의사담당관실 기록팀 소속 속기사들을 만나봤다. / 편집자
 
회의록에 한번 기록되면 영원히 남는다. 속기록 내용을 수정 또는 삭제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와도 지울 수 없다. 수정·삭제 요청이 들어왔다는 그 내용까지 추가돼 저장된다.

충북도의회 속기사들은 회기기간 중 회의록을 작성하는 등 의회 업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왼쪽부터 정지은, 곽윤경, 윤은회, 이지윤, 이규옥, 장미남, 김연주, 김교현 속기사. / 김용수

 

회의록은 영구보존 문서

"속기사는 '의회의 꽃'입니다. 영구보존문서인 의회 회의록를 기록하는,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죠."(윤은회·49·18년차)

"영원히 역사에 남는 현장의 목소리를 정확하고 빠짐없이 기록한다는 점, 집행부와 언쟁 시 가장 정확한 증거로 회의록이 활용된다는 점이 가장 큰 보람이죠."(이지윤·56·32년차)

속기사의 업무는 크게는 의정활동 내용을 회의록으로 담아내는 일이다. 회의내용 속기부터 회의록 원고 작성, 교정작업, 회의록 서명, 회의록 인터넷 공개 및 책자·전자회의록 발간, 보존회의록 문서고 이관을 맡는다. 발언내용은 물론이고 참석자들의 행동, 표정, 회의분위기까지 글로 기록해둔다.

기록 대상은 지방자치법에 의해 의회 회기동안 열리는 본회의, 상임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행정사무감사, 특별위원회에다가 올해 10월부터 산하기관장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추가됐다. 의회 주최 공청회, 공무국외심의위원회, 충북에서 열리는 전국의장단협의회나 전국운영위원장협의회 등도 협조사항이다. 충북도의회는 올해 임시회 6회, 정례회 2회 등 총 129일간 개회했다.

"회기때만 나오는 프리랜서인줄 아는데 회기가 끝나면 할일이 더 많아요. 확인작업과 자료조사, 교정도 봐야 해요. 회기는 임시회는 한달에 1번 2주 정도, 정례회는 1년에 2번 총 60일간 열려요."(김교현·47·18년차)
 

청취력·이해력·문장력 필수

속기키보드

속기는 청취력과 이해력, 문장력, 기억력, 손기술이 필수다. 머리·귀·손이 삼위일체가 돼야 하는 작업이다.

속기사들은 일반키보드보다 2~3배 빠르게 입력되는 '세벌식 키보드'를 사용한다. 입력방식도, 자판배열도 다르다. 입력시간을 줄이기 위해 약어를 쓴다. 예를 들어 '충청북도'를 쓴다고 할 때 '5 ㅎ ㅂ ㅈ' 네 음절을 동시에 눌러 입력한다. 고사성어, 지역명, 나라명, 유명인 이름, 기호, 각종 기념일 등도 약어가 있다.

"속기사는 잘 들어야 하고 잘 이해해야 하고 글로 잘 표현해야 하고 '팔방미인'이에요. 입은 무거워야 하고 회의록을 수정·삭제해달라는 요청이 있어도 소신을 지켜야 해요."(김교현)

"말이 빠르거나 사투리보다는 웅얼웅얼하는 말투가 더 어려워요. 말한 그대로를 기록하지만 문장부호나 띄어쓰기, 조사를 추가하는 후속작업이 필요해요."(곽윤경·52·28년차)

도의회 속기사는 91년 네 명으로 시작했다. PC가 없어서 수기로 속기부호를 써놓은 뒤 다시 원고지에 한글로 옮겨 인쇄소에 넘기면 회의록을 완성해주는 방식이었다. 의회가 열리는 날에는 밤 10~11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이후 90년대 후반 PC가 도입됐고 2001년 지금의 기계속기가 들어왔다.

초창기멤버인 이지윤 차관은 87년 8월 충북도청 총무과에서 일하다가 3년간 주경야독 끝에 속기사자격증을 땄는데 마침 충북도의회가 개원해 옮기게 됐다.

"전봇대에 붙은 속기학원 광고를 보고 국회에 가고 싶다는 마음에 시작했어요. 퇴근후 속기학원에 다니면서 3년간 속기를 배워 속기사가 됐어요."(이지윤)

김교현 주무관은 92년 사무실에 PC가 1대뿐이던 시절 문서작성 기능직으로 시작해 2001년 속기사들의 행정직 전직시험에 합격해 합류하게 됐다. 윤은회(49) 주무관 역시 96년 도청 법무담당관실에서 속기업무를 보다가 2001년 의회로 옮겼다. 장미남(50) 주무관은 청주시의회에서 7년간 있다가 출산후 7년만인 2004년 도의회로 왔다. 막내 정지은(31) 주무관은 진천군의회에서 1년반 기간제로 일하다가 2014년 10월 도의회에 합류했다.
 

전문용어·줄임말 '대략난감'

속기용어집

속기사들을 괴롭히는 건 전문용어, 영어줄임말, 새로 만든 사업 이름, 추임새 등 다양하다. 정확한 표현을 위해 녹음파일을 확인하거나 발언자 등에게 직접 설명을 듣는 등 이중삼중 확인작업을 거친다. 특히 경제·농업·건설분야, 의료원과 보건환경연구원 쪽이 손이 많이 간다고 토로했다.

"충주의료원 행정사무감사에서 '국정원' 이라는 말이 몇번 나오는 거에요. 확인해봤다니 '국중원'이더라고요. 국립중앙의료원의 약자였어요. 또 사업명칭을 신조어로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발음만 들어서는 이해가 안돼요. 행감에서 '기업'이라는 말이 나와 알아보니 기운 '氣'에 영어 'UP'을 조합한 거였어요."(이규옥·52·32년차)

"'뭐냐면', '거시기', '근데', '이제' 같은 의미없는 추임새를 습관적으로 쓰는 분들이 있는데 회의록 가독성을 위해 꼭 필요한 문장에서만 넣어요"(윤은회)
 

숨길 수 없는 직업병

직업병도 생겼다.

"나도 모르게 맞춤법 교정을 봐요. 뉴스자막을 보면서 틀린 글자를 찾아내고, 간판이나 안내문구에서 오타나 띄어쓰기가 보이면 불편해요."(김교현)

"고개를 숙이고 키보드를 치다 보니 처음엔 목에 담이 걸려서 힘들었어요. 의원들이 질의할 때 큰 목소리로 혼내키잖아요. 깜짝깜짝 놀라요."(정지은)
 
"10년 전, 속기하다가 위경련이 와서 1시간 넘게 회의장에 못 들어갔던 일이 있었어요. 파트너가 완성해줘서 고마웠지만 아프면 안되겠구나 생각했죠."(윤은회)
 

속기사는 ─다.

충북도의회 속기사들은 회기기간 중 회의록을 작성하는 등 의회 업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왼쪽부터 곽윤경, 김교현, 정지은, 윤은회, 이지윤, 이규옥, 장미남, 김연주 속기사. / 김용수

충북도의회 속기사 8명은 폭넓은 지식을 갖춘 '백과사전'처럼, 다재다능한 '팔방미인'처럼 의회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영구히 남을 '책'을 남기고 있다.

"속기사는 '백과사전이어야 한다'. 아는만큼 들린다고 깊이는 아니지만 넓게, 많이 알아야 해요. 도정 현안도 많이 알고 있어야죠."(이규옥)

"'역사책'이다. 책의 내용이 변함없듯이 저희도 변함없이 기록하니까."(곽윤경)
 
"산증인이다.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니까."(이지윤)
 
"회의록이다. 의원님들이 열심히 의정활동하신 것들이 회의를 통해 드러나고 그 결과물을 속기사들이 기록해 회의록으로 영원히 남기 때문에."(장미남)
 
"신세계다. 남의 말을 받아 쓴다고만 생각하는데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입니다."(정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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