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유재풍 변호사

꼭 한 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아들이 고교 졸업하던 해 겨울 처음 만난 뒤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벼르고 별러서 만났습니다, 제주도 한라산. 그것도 아내와 함께. 저는 17년 만이고, 아내는 40년 만입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멀어서 그랬습니다. 육지 산은 아무리 멀어도 차로 세 시간 내외면 갈 수 있지만, 여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항공기와, 그 뒤에 버스든 택시든 또 타야 합니다. 왕복 19.2㎞, 8∼9시간은 걸어야 합니다. 높이도 남한에서 가장 높은 1950미터입니다. 엄두가 잘 나지 않았습니다.

동행을 약속한 아내도, 날씨가 나빠졌으면 했답니다. 평소 산을 많이 다녀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험하지는 않지만, 하루에 20㎞ 가까이 걸어야 한다니,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날도 푸근해지고, 기온도 알맞은 15℃ 내외로 예상되었습니다. 금요일 저녁 항공기로 제주에 도착해 라이온스클럽 동기 총재 내외의 후의로 맛있는 저녁식사 후 호텔에서 쉬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기상해서, 아직 열지 않은 호텔 식당에서 커피와 빵, 달걀, 귤 몇 개씩을 받아서, 산행 출발지점 성판악으로 향했습니다.

성판악 주차장과 주변 도로는 수많은 차량으로 이미 포화상태입니다. 겨우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산행을 시작하니 7시39분, 여기서부터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일단 7.3㎞를 걸어야 합니다. 비교적 밋밋하지만, 지루한 길입니다. 현무암 돌길인데, 곳곳에 나무데크와 마닐라 삼 매트를 깔아서 걷기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수백 명의 등산객이 힘이 됩니다. 7살 어린이부터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까지 남녀노소 많은 이들이 정상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저희 부부도 그 틈에 끼었습니다. 돌아오는 항공편 때문에 마음이 바쁜 아내가 열심히 걸었습니다.

세 시간 만에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애초, 아내가 힘들어 하면, 대피소에 쉬게 하고 저만 정상에 다녀올 생각이었습니다. 2.3㎞지만, 본격적으로 고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휴식을 취한 아내가 다른 등산객들과 어울려 저보다 앞장 서 나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산 아래 동네 모습이 보이고, 처음부터 보이던 조릿대와 참나무 외에도 늦가을의 한라산 바람과 나무들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고사목도 나타납니다. 하늘도 개어 파랗습니다. 발밑으로 아름다운 운해(雲海)가 펼쳐집니다. 아내는 "좋다, 좋다!"를 연발합니다. 많은 이들이 줄지어 정상 쪽으로 걸어 올라가는 모습이, 몇 년 전 이스라엘 시나이(Sinai)산 오르던 추억을 생각나게 합니다.

드디어 출발 네 시간 반 만에 백록담에 도착했습니다. 정상부근에는 먼저 도착한 수백 명이 사진촬영, 점심식사 등으로 시끌벅적합니다. 백록담이 내려다보이는 펜스 쪽으로 가서 사진을 몇 장 찍고, 관음사 쪽으로 옮겨 제주 시내를 한 눈에 바라봅니다. 참 멋진 풍경입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니, 놀랍고 감사합니다. 산에 많이 다닌 분이나, 젊은이들에게는 별 것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 산에 잘 다니지 않던 아내에게는 결코 작지 않은 도전이었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저로서도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17년 만에 별러서 간 겁니다. 그런데 아내가 해냈습니다. 더 늦기 전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는 의지로.

하산 길에 아내가 말합니다. 근래 정기적인 스트레칭과 동네 산 걷기, 런닝머신 운동을 통해 체력이 좀 나아진 것 같다고. 이번 등반으로 자신감이 생겨 산티아고 800㎞도 도전해 볼 수 있겠다고. 돌아오자마자, 일전 구입한 '산티아고 순례길 가이드북'을 아내의 화장대 위에 슬며시 올려놓았습니다. 며칠 후 맞을 회갑 전에 성취한 작은 도전을 바탕으로, 더 큰 도전에 나서길 기대하며.

유재풍 변호사
유재풍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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