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김윤희 수필가

1981년 진천 백곡면 대문리 버스 개통식
1981년 진천 백곡면 대문리 버스 개통식

하늘만 빠끔한 산골동네에 경사 났어요/ 마을공터에 주민들이 모두 나와/ 동네까지 들어온 시내버스를 맞습니다.//

울퉁불퉁 비포장 삼십 리를 걸어서/ 곡식보따리를 목 빠지게 이고지고/ 진천읍내 5일장 보러 걷던 길//

한여름 후줄근한 땀줄기 위로/ 뽀얀 흙먼지 일으키며 지나치던 버스가/ 이제 동네 안까지 매일 다닌답니다.//

돼지머리에 떡시루, 막걸리 차려놓고/ 온 동네사람 다 모여 고사를 지냅니다/ 무사고, 더 잘사는 마을 되게 해 달라고….//

탕탕, 오라잇! 버스안내양 밝은 목소리 타고/ 산골마을은 부릉부릉 활기차게 깨어납니다./ 그때 그 시절 시내버스는 운송 수단을 넘어/ 산골과 시내 간 소통, 희망 그 자체였어요.//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들 무렵 휴대폰으로 메시지 1통을 받았다. 고향마을에서 '작은 가을음악회'를 한다는 내용이다. 몇 십호 모여 사는 동네에서 음악회라니…. 반신반의하며 가보니 개인 집에서 여는 음악회였다. 뜨락에 무대를 만들고 마당에 플라스틱 의자를 깔아 객석으로 꾸몄다. 집 주변엔 가을꽃들이 절로 피어 정취를 더했고, 키 큰 감나무엔 빨갛게 감이 익어가고 있다. 조촐한 객석을 채우느라 감나무엔 까치들이 가끔씩 음악회에 추임새를 넣는다. 고향을 떠나 살던 아들이 부모님 다 돌아가신 뒤 귀향하여 집을 예쁘장하게 수리하여 대를 잇고 있는 곳이다. 주인장 인맥으로 동참한 연주자들의 실력은 수준급이다. 동네 젊은이들의 도움을 곁들인 작은 음악회는 자연 그대로가 무대이고, 순수한 마을 사람이 관객이다. 정겹고 아기자기한 순수가 아름다운 선율을 타고 가을 저녁을 흐른다.

읍내에서 승용차로 10여분 거리를 오늘은 사정상 버스를 타게 되었다. 쾌적하다. 오랜만에 차보는 버스가 아득한 내 젊은 날의 추억을 불러온다.

1970년대,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20리 길 통학을 했다. 그때만 해도 버스는 큰 길인 국도로만 다녔다. 그것도 1시간에 1대 정도였고, 날씨에 따라 결행도 잦았다. 아침 통학시간에 결행을 하면 터덜터덜 비포장 길을 걸어서 등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낮에는 차 시간 간격이 더 뜸했다. 국도에서 한참 들어가는 동네에 사는 친구들은 차타는 곳까지 몇 십 분 또는 1시간 이상을 걸어 나와야 했다. 다행히 우리 동네는 10여 분만 걸어 나가면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닷새에 한 번씩 서는 장날에는 버스가 사람과 짐으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요행이 빈 좌석이 나도 학생들이 버스 의자에 앉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다. 미처 자리 양보를 안했다가는 호통을 당하기 일쑤였고, 뉘 집 자식 버릇없다는 소문이 금세 나기 때문이다. 면 단위는 대개 서로의 집안을 다 알고 지내는 터라 나의 행동은 곧 부모님의 교양과 직결되었다. 2년 가까이 그렇게 통학을 하다가 읍내로 이사를 나오면서 버스통학은 막을 내렸다.

그 후 성인이 되어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다시 만원버스에 짐짝이 되기 시작했다. 시내버스는 수시로 있었지만 출근시간 버스는 항상 초만원이었다. 간신히 다리 한 짝이라도 올려놓으면 버스 안내양은 사람을 마구 꾸겨 넣으며 차 문도 닫기 전에 "탕탕, 오라잇! 소리와 함께 아슬아슬 차를 출발시켰다. 버스안내양도 여간 힘이 세지 않고는 견뎌낼 수 없었을 게다. 차 문을 닫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태운 다음 두 손으로 문을 잡고 배로 사람을 밀어 넣는다. 차가 출발하면 용케도 문이 닫히는 게 신기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 겨우 올라타고 근 한 시간을 끼어 가노라면 사람 냄새에 토악질이 나서 몇 정거장 가다 내려 잠깐 숨을 돌리고 다음 차를 타곤 했다. 다음 차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득한 처녀시절의 이야기다.

그 즈음 내 고향 진천에서는 국도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까지 버스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을 공터에 떡하니 버스를 세워놓고 돼지머리에 시루떡을 해놓고 고사를 지내는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얼마나 좋았을까. 무사고 안전운행을 위한 기원만은 아니었을 게다.

읍내를 향해 달리는 시내버스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산골동네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꿈을 열어주는 통로였을지도 모른다. 조용하던 동네에 "오라잇!" 소리를 외치던 칼칼한 버스안내양의 목소리와 함께 탕탕 버스 문을 치는 소리는 산업화를 향해 부릉부릉 발동 거는 소리요, 잠자고 있던 의식을 깨우는 소리였으리라. 젊은이들 마음을 서울로, 서울로 향하게 하던 소리였다.

그 귀한 버스가 지금은 텅텅 비어 다닌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나가 있고, 몇 남은 젊은이들은 아무리 산골짜기에 살아도 다 자가용이 있다. 사람 수보다 자동차 수가 더 많은 집도 있다. 승용차, 트럭, 경운기, 트랙터, 자전거….

버스는 운전을 할 수 없는 노인들이 주 고객이다. 만원버스에 땀 냄새, 사람냄새에 시달릴 걱정은 없다. 모두 자리에 앉을 수 있을 만큼 자리도 넉넉하고, 냉난방 시설이 다 되어 있어 승용차 못지않다. 열악하면서도 기세 좋게 부르릉 거리던 버스는 물론, 버스안내양도 이젠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 사는 맛이 그립다는 거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