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서정석 공주대박물관장·교수

백제가 공주에 도읍을 두고 있었을 때 왕궁의 위치에 대해 대체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정방뜰', 즉 '소징이뻘'에 있었다는 견해고, 다른 하나는 공산성 남쪽 기슭 지금의 '덕성공원빌리지' 근처라는 견해고, 또 다른 하나는 공산성 안에 있었다는 견해다.

'정방뜰'은 지금의 한옥마을과 국립공주박물관 서남쪽 일대의 들판을 말하는데, '정방뜰'이라 불리우는 것은 이곳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그가 거느린 군대가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정방이 이곳에 머물렀다면 당연히 왕궁도 이곳에 있었으리라는 추론이다. 적어도 소정방이 백제 왕궁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언뜻 들으면 그럴 듯하지만 실은 백제가 멸망하던 660년 7월 소정방과 그의 군대는 공주에 오지 않았다. 당시 도읍지는 부여였고, 그래서 부여에 머물러 있었다. 실제로 이곳에 대해서는 지표조사를 해 보았는데, 왕궁과 관련지을 만한 흔적은 전혀 찾지 못하였다.

공산성 남쪽 기슭에 왕궁이 있었으리라는 견해는 부여의 경우를 참고한 것이다. 부여는 부소산성이 있고, 그 바로 남쪽인 관북리 일대에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서면 뒤쪽으로 부소산을 등지고, 앞으로 부여읍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데 그러다 보니 공주 왕궁도 그러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마침 이곳에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변이 1m 정도 되는 대형 초석 2매가 지표상에 드러나 있었다. 그러다보니 웅진 도읍기 백제 왕궁 자리라는 확신을 갖게 했는데 실제 발굴조사에서는 왕궁은 고사하고 번듯한 건물지 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이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웅진 도읍기 백제의 왕궁은 공산성 안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공산성에 대한 여러 설명을 통해서도 확인되지만, 무엇보다도 태통사터를 제외하고는 공주 시내에서 기와가 출토되는 곳은 공산성이 유일하다.

삼국시대 때 기와는 왕궁이나 사찰, 관공서 등지에서나 사용할 수 있었기에 적어도 기와가 나와야 왕궁 후보지가 될 수 있는데, 앞의 두 곳은 기와가 전혀 보이지 않은데 비해 공산성 안에서는 무수히 많은 백제 기와가 나오고 있다.

공산성 안 왕궁 후보지로는 쌍수정 앞 광장이 유력하다. 이곳 남쪽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형태가 둥근 원형(圓形)으로 돌로 쌓아서 만든 연못이다. 직경이 7m, 깊이는 4m 정도된다.

어찌보면 평범해 보이기는 이 연못을 주목하는 이유는 동성왕 22년(500) 궁궐 동쪽에 연못을 조성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뒷받침해 주는 고고학적 자료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현재 쌍수정 앞 광장에 가면 원형 연못이 매끄럽게 잘 정비 복원되어 있다. 다만 연못임에도 물이 채워져 있지 않아 쓰레기가 들어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기회에 아예 원래의 취지대로 조경용으로 가꾸면 어떨까 한다. 흙으로 채우고 연꽃을 심으면 좋을 듯하다. 그러면 보기도 좋고, 쓰레기가 들어갈 일도 없을 것이다.

마침 공주에는 한일교류를 상징하는 '무령왕 오가하스연꽃(大賀蓮)' 있다. 이 연꽃을 심는다면 볼거리도 제공하고, 문화유산을 적절히 활용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공주가 한일 교류의 상징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서정석 공주대박물관장·교수
서정석 공주대박물관장·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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