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여행]김홍철, '건축의 탄생' 저자

프랭크로이드라이트의 벽난로가 있는 낙수장 거실 / 건축의 탄생에서
프랭크로이드라이트의 벽난로가 있는 낙수장 거실 / 건축의 탄생에서

여기저기서 첫눈이 내렸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입으려고 벼르고 있었던 재킷을 입지도 못할 만큼 언제나 가을은 빠르게 지나갔었는데, 올해는 유독 겨울이 늦게 찾아왔다. 악명이 자자했던 수능 날 한파는 소식이 없었다. 날이 아직 포근해서 가로수는 나뭇잎 옷을 다 벗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었고, 내 두 다리는 반바지로도 잠시 편의점을 갈 수 있을 만큼 버틸 만 했다. 그렇게 겨울은 오는 듯 마는 듯하다가 아무 예고 없이 눈은 내렸다. 2019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마지막 달 12월은 어김없이 추위보다 먼저 틈을 비집고 찾아왔다. 그걸 알았는지 부랴부랴 추위는 급하게 뒤따라왔다. 그렇게 우리는 추위를 피해 따뜻한 곳으로 모여 서로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겨울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나는 겨울에 수증기 가득한 작은 어묵 가게에서 사람들끼리 둥그렇게 둘러앉아 따뜻하게 데운 술 한 잔과 육수에 퉁퉁 불은 어묵을 먹으며 숙덕거리는 걸 좋아했다. 그저 작은 공간에 모여서 앉아있다 보면, 앞자리 옆자리 할 것 없이 서로의 대화가 여과없이 들린다. 옆 사람이 들을까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조차 모두 들린다. 각자 사는 얘기가 다 거기서 거기이겠지만, 누군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여주면서 마음이 채워지길 바란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아무리 좁아터진 곳이라 해도 비집고 들어가 앉는다. 옆자리 사람과 어깨가 부딪힐지언정 그 자리에 억지로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서 각자 삶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살아갈 이유를 하나씩 만들어간다.

그곳에는 온기가 있다. 온기가 있는 곳엔 언제나 삶이 담긴 공간이 있다. 어릴 적에 방 안에 가족 모두 둘러앉아 고구마를 까먹으며 텔레비전 앞에서 키득거렸고, 노란 주전자가 올라앉아 있는 석유 난로 옆에서 함석 연기통에 손을 얹어 녹이고 있으면, 또 누군가가 난로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됐다. 그러다가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뜨거운 줄도 모르고 옷에 구멍을 내기도 했다. 온기는 사람을 모이게 하고, 그곳에서 일어난 대화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서로를 완성시킨다.

사람을 모아 얼굴을 마주 보게 한 것은 불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서 불의 형태가 변했다. 위치도 거실벽으로 이동했다. 둥그렇게 앉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던 공간에서 인간은 모두 벽을 향해 고개를 돌려 종일 네모난 불빛만 바라보게 됐고, 나중에 좀 더 작고 스마트한 불빛에 머리를 푹 담그고 말았다. 하지만, 머리를 서로 맞대고자 하는 인간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소셜미디어라는 보이지 않은 공간으로 들어가 기계 안에서 서로 다시 마주 보게 됐는데, 여기서 우리의 대화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말은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더욱 풍부해지고 새로워졌다. 그리고 더욱 치열해졌다.

가상공간은 입체적이지 않다. 밝지만 어둡다. 그래서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곳을 악용하는 무리도 보인다. 얼마 전, 한 연예인이 악플에 견디다 못해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은 공간에서 얼굴을 숨기고 잔혹한 혀로 상대를 찌른다. 그리고는 자신이 마치 역전의 용사가 된 마냥 해냈다는 성취감을 가지고 군중 속으로 몸을 숨겨 버린다. 이건 절대 공정하지 않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과 낙수장을 설계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집을 지을 때 언제나 화목한 가족을 생각했다. 그래서 벽난로를 집 가운데 두고 그 위에 이런 글을 새겼다.

"이 벽난로에 있는 좋은 친구는 악마의 말을 하지 않는다."

김홍철 '건축의 탄생' 저자
김홍철 '건축의 탄생' 저자

말은 보이지 않지만, 마치 손과 같아 어루만지기도 하고, 툭툭 건드리기도 한다. 서로 맞잡아 공감하기도 하고, 뿌리쳐 내치기도한다. 하지만 폭력은 누구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상대는 감정을 쏟아부을 쓰레기통이 아니다. 겨울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더는 차가운 말로 따뜻한 불을 꺼뜨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세상에는 누구도 아프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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