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사람은 자기 이름과 함께 평생을 살아간다. 이름은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글을 배우면서 처음 써보는 글자가 바로 자신의 이름이고. 엄마, 아빠, 가족의 이름을 아는 것에서부터 배움에 눈이 뜨이게 되는 시작인 것이다.

어릴 땐 알지 못했다. 내 친구 말희네 집에 언니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니 말희(末姬)란 이름 역시도 '딸은 이제 그만!' 아들 동생을 보라는 어른들의 기원이 담긴 여섯 번째 딸 이름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이름을 짓기 위하여 매우 고심하며 소망과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뜻을 담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대사의 여성 이름에는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게 박힌 슬픈 이름들이 많이 있다. 갓 낳은 아기란 뜻의 갓난이. 아들이 아니라서 기대에 어긋낫다 하여 언년이. 딸 그만 이기를 바라는 딸그만이.

혈통을 중시하는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남자들의경우 족보의 항렬을 따라 이름을 매우 중요시했다. 상대적으로 여자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이름다운 이름이 없었다. 어려서는 가정의 울타리에 속해 있었고, 혼인을 하고 나면 주로 친정집 지명을 따라 이름을 대신한 택호(宅號)로 불렀다. 청주댁. 서울댁. 전주댁. 강릉댁, 김천댁으로. 여성의 이름은 시대에 따라 사회상이나 유행이 반영되어 변화를 거듭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영자의 전성시대를 이룬 영자(英子) 등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으로 일본어의 고(子)자를 사용한 이름.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시대에는 '순(順, 순하다)'과 '숙(淑, 맑다)'을 강조한 이름. 세월이 흐르면서 뜻이 좋고 음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변모를 거듭해 여성미를 강조하는 희(姬), 옥(玉), 정(貞), 미(美), 주(珠), 혜(惠), 영(英) 등 예쁜 느낌의 이름들이 많이 쓰이게 되었다. 이제는 현대적·서구적·중성적 또는 개성을 강조한 새로운 느낌의 이름이거나 보람, 한결, 우리, 아름 등 예쁜 우리말 이름도 많아졌다.

보암직도 하고 보기에 탐스럽기도 한 빨간 카네이션에 연두빛 봉데이지와 편백 나뭇잎으로 장식한 소담스러운 꽃바구니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분홍색 리본에는 '1985년도 옥천여고 제자 천서운'이라 쓰여있었다. 삼십 년이 훨 지난 오래된 제자가 보낸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긴 고마운 선물이다. 서운이는 공부를 꽤 잘하는 밝고 명랑한 소녀였다. 국립대학 국문과에 합격했지만 형제가 많아 가정 형편상 대학진학을 할 수 없었다. 서운이는 직장생활을 하다 이제는 넉넉한 가정의 안주인이 되아 소중한 추억을 간직할 줄 아는 행복한 여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열여덟 여고생 제자가 쉰 아줌마 되어 그 옛날 선생님을 찾아와 그때는 알지 못했던 가슴 아팠던 지나온 세월을 술술 풀어낸다.

"선생님 제가 아들이 아니고 딸이라고 제 이름이 서운이잖아요." 순간 지금까지 에쁜 이름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는 적지않은 충격이었다. "그래 그랬구나!" 그녀가 말했다."사실 저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래도 저는 제 이름을 지어주신 부모님 원망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이름을 바꾸기도 하지만 이제껏 살아온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생각하거든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 이름값을 하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듯, 살면서 사랑하면서 이름값 하고 사는 게 중요하다는 서운이의 말이 아프게 기억에 남는다.

이경영 수필가<br>
이경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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