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한병선 교육평론가·문학박사

흔히 양심을 '영혼의 목소리'라고 한다. '영혼의 거울'이라고도 말한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듯, 우리는 양심의 거울을 통해 선악을 판단한다. 도덕과 윤리가 사회적인 합의의 성격을 띤다면 양심은 개인적인 덕목의 영역이다. 도덕적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신 내부의 판단에 의한 것이다. 예컨대 세상을 속여도 자신의 양심은 속이지 못한다는 말 그대로다.

알베르트 까뮈(Albert Camus)의 작품 '전략'에 변호사 클라망스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그가 세느강 다리를 건너는데 울고 있는 한 여자를 발견한다. 직감적으로 그녀가 강으로 뛰어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때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두 가지의 다른 소리에 갈등한다. "빨리 가서 저 여자를 도와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여자는 뛰어내리고 말거야," 또 다른 소리는, "아니야, 바쁜데 그냥 지나가지 뭐, 남의 일에 잘못 끼어들었다가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어," 클라망스는 갈등을 하다가 못 본 일로 하고 그냥 지나친다. 순간 풍덩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후 젊고 유능했던 변호사 클라망드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사실 그가 여자를 구해주어야 할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 하지만 그의 양심은 그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양심과 책임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책임이 아닌 양심의 문제다. 우리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상황에서 모른 척 지나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적극적으로 나서 자신의 일처럼 돕는 사람들도 있다. 주변 사람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반드시 도와야 할 의무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을 돕는 것은 우리 안의 '선성(goodness of human)'과 양심 때문이다.

성서적으로 인간은 선한 존재다. 선과 악이 무엇이며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판단할 수 있다. 태초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지혜를 알게 하는 '선악과'를 따 아담에게 먹도록 권했던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절대자는 인간을 자신의 선성을 그대로 인간에게 투영시켰다. 하와는 이 열매를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선악, 즉 '해도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도덕이 사회적 산물이라면 양심은 생득적(生得的)이다. 도덕이 학습에 의해 습득되는 것이라면 양심은 지속적인 성찰에 의해 발현된다. 블라이세 파스칼(Blaise Pascal)은 "당신의 방으로 가라.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있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부 교육학자들이 미래교육의 종착점은 영성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속적인 교육과 성찰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도덕이 되었든, 양심이 되었든 모두 교육적 노력이 중요하다. 사회적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회는 개인들의 집합체다. 사적인 관계에서는 개인적 양심에 의해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또한 인간미가 넘치는 관계를 만들어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집단은 다르다. 개인의 양심과 도덕보다는 집단적 이기논리가 우선적으로 작용한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Niebuhr)는 이를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immoral society)로 표현했다.

개인들의 도덕적 양심은 모든 인간 문제의 핵심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개인들 간의 도덕 문제든, 집단의 문제든, 모든 문제의 열쇠는 결국 지속적인 교육과 성찰의 힘에 달려있다는 함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제는 인성교육을 넘어 참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영성교육'으로 시야를 넓혀야 할 때라는 의미다.

[중부시론] 한병선 교육평론가·문학박사
[중부시론] 한병선 교육평론가·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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