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영희 수필가

새하얀 꽃송이가 한꺼번에 개화한 듯 창밖이 눈부시다. 우리가 잠든 사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다녀가셨나 보다. 이렇게 눈이 내리고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면 나는 오래전 산사에서의 그날로 돌아가 청정한 추억 속에 잠긴다.

이산 저산 산행을 즐기던 우리는 미루던 강원도 오대산을 가기로 했다. 그곳은 겨울이 더 절경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봄에 가자는 의견은 못 들은 체 강행을 한 것이다. 눈이 좀 온다고는 했지만 폭설이 올 거라는 예보는 없었다.

산길로 접어들 무렵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주먹만 한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돌아가기보다는 가까운 월정사로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월정사 추녀 밑에서 한참을 서서 기다렸으나 눈은 그치지 않았다.

마침 때가 되었으니 공양을 하라는 스님의 말씀을 좇아서 눈에 푹푹 빠지며 공양간으로 갔다. 배낭에 준비해 간 음식이 있었지만 따뜻한 공양간 절 밥을 게눈 감추듯 했다. 한 톨 남은 것 없이 발우를 비우고 자신이 설거지하는 게 복을 짓는 일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공양주가 거처하는 따뜻한 온돌방에서 이때나 저 때나 눈이 그치기를 기다렸으나 종일 눈이 오기로 결심을 한 듯 계속 쏟아졌다. 스님은 눈길 위험하니 자고 가는 게 안전하다고 방을 내주셨다. 공휴일이고 세 부부가 온 데다 방학을 했으니 큰 부담은 없었다. 어차피 못 가니 느긋하게 지내자고 했더니 일행 중 두 명이 손사래를 쳤다. 크리스천이 절에서 성탄절을 보내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면서 한 걱정을 했다. 생명을 담보로 한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기로 하고 고즈넉한 산사의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하였다.

본의 아니게 산사에서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게 된 것이다. 불자도 아닌 지나가는 중생이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았으니, 새벽 예불 시간에 참석하는 게 도리일 것 같았다. 우리 말고 두 팀이 더 발이 묶였는데 스님의 법어가 시작되었다.

성탄을 맞이하여 일반 교회처럼 먼저 성탄절 축하로 시작을 하였다.

"마태복음의 내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하라는 말씀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말과 같습니다.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같다는 것이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라는 히브리서 11장 1절을 아실 것입니다. 처처 불상 사사 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 이란 말씀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마음이 짓는 것이니 장소 불문하고 어디서든 온 정성을 다하면 된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때 이렇다 할 종교를 갖지 않았는데 말씀으로만 듣던 고승을 여기서 뵙는구나 싶어 내가 선택된 사람 같이 느껴졌다.

대웅전에서 의당히 설법을 하시는 게 옳은데 다른 교리를 들어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이 다 같음을 알려주시며 중생들의 마음을 다독인 것이다.

그때 그 말씀을 듣고 나니 내 마음도 새하얀 눈같이 청정해진 것 같았다. 이윽고 폭설이 멈추고 덕분에 우리 여섯 명은 설경을 감상하며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그 스님을 한번 다시 뵙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지만 사는 일에 휘둘려서 2년여를 보내고 월정사를 찾았다. 두리번두리번 스님을 찾았으나 뵐 수 없었다. 얼마 전에 입적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심장에서 피돌기가 잠시 멈추는 듯 가슴이 허허로웠다. 조금 더 일찍 왔더라면 하는 후회가 되었다. 그래서 미련한 중생이란 용어를 쓰는구나 싶었다. 눈에 홀려서 헛것을 본 듯 한동안 마음이 허전했다. 세상의 모든 물체는 실체가 없는 것이라지만 오랫동안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성탄절이 가까워 오면 나는 그때 몸 달아 하던 친구들에게 "산사에서 맞는 성탄절 어때?"라며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간다. 무모한 도전도 아름답던 젊음이 있었는데.

사랑의 크리마스 캐럴에 화답하는 자비의 풍경소리가 그윽하다. 종교가 추구하는 사랑이나 자비는 이음동의어라는 스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영희 수필가<br>
이영희 수필가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