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훈 지도자로 새출발 신화 기대

20년 야구인생을 정리한‘연습생 신화’장종훈.
장종훈을 제외하고 90년대 한국프로야구를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프로야구에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그는 홈런왕=장종훈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고 한국프로야구의 거목이자 산증인인 그가 한야구에 남긴 족적은 그 자체가 역사라고 할 만큼 엄청나다.
지난달 10일‘기록의 사나이’장종훈(37·한화이글스코치)가 정들었던 그라운드에 작별을 고했다.
이수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가 그냥좋아 시작한지 무려 20년만에 배트를 손에서 놓는 셈이다.
20여년간 야구와 함께하면서 수많은 좌절을 겪었음에도 불구, 한국야구 전설로 남았듯이 앞으로 지도자로 장종훈은 확고한 신념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야구발전에 노력을 할 것이다.

‘촌놈’장종훈의 야구인생을 되돌아 본다.

▶유도선수에서 야구선수로 변신


초등학교 5학년때 야구를 시작한 장종훈은 처음에 유도선수였다.

충북영동 이수초등(현 용담초) 별명이 돼지로 덩치가 좋아 유도를 시작했지만 창문너머 야구하는 모습이 너무 멋져보여 다음날 코치를찾아가 야구 시켜 달라고 졸라서 시작했다.

그러나 유도하는 것은 관대했던 아버지가 야구는 반대를 많이 했지만 상관하지 않고 열심히 배트를 휘둘렀다.

이후 장종훈은 세광중을 진학해 프로야구 경기때 OB베어스와 삼성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볼보이를 하면서 박철순 선수의 경기를 지켜보며 꿈을 키웠다.

세광고시절 선배 송진우보다 머리하나가 작아 168cm, 58kg의 왜소한 체격이 전부여서 키크게 해달라고 기도도 많이 했다고 회고했다.

특히 이당시 장종훈은 컨트롤이 좋다는 이유로 오른팔이 안쪽으로 25도 휠정로 배팅볼을 던졌으나 눈에 뛰어나지 않는 선수였다.

그러나 프로야구에서 범생이라고 소문난 장종훈도 세광중 1학년때 2년선배인 송진우 졸업식후 야구팀 전체 뒷풀이에서 처음 입에 술을 댓다.

세광고 2학년때 친구가 담배피는 것이 멋있어 시작해 17년동안 담배를끊지 못한 담배도 큰아들 현준이가 아빠한테 할아버지 냄새가 난다는 충격을 받고 끊었다.

30개월째 금연중.


▶꿈에 그리던 프로야구단에 입단하다.


고교졸업후 장종훈은 흔히 말하는 실업자 생활을 할뻔했다.

지난 1986년 세광고등학교를 졸업한 장종훈은 전국대회에서 이렇다할 성적도 내지 못하고 장종훈도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해 갈 곳이 없었기 때문.

장종훈은 졸업한 해 연고팀인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 이글스)에 겨우 연봉 600만원을 받고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배트를 휘두루고 또 휘둘렀다.

간혹 시합에 나가 에러라도 하는 날에는 눈물이 날 만큼 혹독한 질책이 돌아왔지만 이를 악물며 참고 또 참으며 다시 배트를 잡았다.

결국 그는 팀의 주전 유격수를 차지하게 됐고 프로에서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숙소에는 자신의 단점과 장점을 빼곡히 적어놓았다.

‘연습생 신화’의 시작이었다.


▶야구앞에서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기록의 사나이로 변신


1군에서 장종훈은 가끔 대타로 타석에 나갔으나 몸이 굳어 제대로 치지도 못하고 삼진을 당하고 그렇게 연습을 했는데도 에러가 속출해 좌절하기도 했으나 다시 일어나 팀의 주전 유격수를 꽤차게 된다.

빙그레 초대 사령탑인 배성서 감독의 눈에 띄어 1군으로 발탁된 장종훈은 1990년부터 1992년까지 홈런과 타점 부문 타이틀을 휩쓸면서 국내 최고의 슬러거로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장종훈은 이때부터 한국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길 각종 기록들을 세워가기 시작했다.

1992년에는 41개의 홈런을 치면서 국내 최초로 40홈런의 벽을 허물는 신기록을 수립했고 15시즌 연속 두 자릿수 홈런, 국내 최다 홈런인 339개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91년과 1992년에는 최우수선수의 영광도 차지한 장종훈은 골든글러브도 5차례나 수상하며 90년대 중반까지 프로야구 간판 선수로 우뚝섰고 1999년에는 그토록 갈망했던 한국시리즈 우승도 맛봤다.

장종훈은 개인통산 최다인 1천949경기에 출장해 6천290타수 1천771안타로 통산 타율 0.282, 340홈런, 1천145타점을 기록, 홈런과 타점, 득점, 경기, 타수 등 각종 부문에서 통산 1위에 올라‘기록의 사나이’가 됐다.


▶연습생 신화가 남긴 고졸신화

장종훈은 트레이드마크가 된 연습생 신화 고졸신화라는 말을 싫어한다.

대학에도 가고싶었다. 자식들에게 대학나온아빠로 기억되길 원해 대학에 가고 싶었다.

한때 한 대학교에서 입학제의가 왔고 그냥이름을 걸어놓고 수업과 시험을 치거나 하지 않는 가짜(?)대학생으로 제의가 왔으나 장종훈은 단호히 거절했다.

비록 고졸신화라는 별명이 좋을릴 없지만 장종훈이 대학에 입학하면 고졸신화는 사라지고 학력의 부끄러워하는 모든사람들의 희망이 사라질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서 였다.

장종훈의 기록 실력보다 사람냄새나는 인간미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전격은퇴와 지도자 장종훈

2000년 이후 체력적인 열세를 드러내며 하향곡선을 그린 장종훈은 올 시즌 고작 6경기에서 홈런 1개를 쳐 9타수 1안타에 그쳤다.

지난 4월20일 1군 등록이 말소돼 2군에 머물던 장종훈은 은퇴를 결심해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현재 2군 타격코치를 맡으며 지도자 수업을 하고 있는 장종훈은 처음 지도자가 어색했으나 선수들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로 변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준비중이다.

한화 구단도 장종훈이 지도자로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뒷받침하기로 약속했다.

감독석에서 선동열이 그랬던 것처럼 후배 선수들에게 사인을 보내는 감독 장종훈을 팬들은 바랄뿐 아니라‘야구앞에서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장종훈의 말에서처럼 지도자생활에서 또한번의 신화를 창조해보길 기대해 본다.


▶팬들과 가족에게 미안

장종훈은 많은 사랑 줘서 감사하고 과분한 사랑만 받고 준게 없어 없어서 미안하고 마지막에 힘있는 모습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쉽다고 밝혔다.

또 청주홈팬들의 남다른 사랑을 너무받아 이젠 선수가 아닌 또 다른 멋진 장종훈이 되어 여러분 앞에 서겠다고 다짐했다.

이와함께 가족들에게도 그동안 잘하지 못했는데 기회가 되면 가족들과 함께 여행도 가고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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