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친구와 술은 묵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하듯 내게는 나와 인연을 맺은 것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추억하는 '되새김의 철학'이 있다. 친구에게 받은 편지나 카드, 초등학교 상장부터 중고등학교 학생증과 성적표, 심지어 영어 단어를 정리한 수첩까지, 온갖 잡동사니들을 이사할 때마다 데리고 다닌다. 남들 보기 하찮게 보이는 빛바랜 종이 한 장, 한 줄 메모조차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 속에 담겨있는 추억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쥐띠 부인 아니랄까봐 뭐든 쌓아 놓을 줄 만 알지 도무지 버릴 줄은 모른다"며 핀잔을 주는 이가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유행과 상관없이, 세월의 때가 묻은 오래된 물건들을 한결같이 정갈하게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정겨울뿐더러 존경심마저 생긴다. 그런데 얼마 전 "쥐띠 부인하고 결혼하길 잘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일이 있었다.

집 안 구석구석 대청소를 하던 중 책꽂이에 겉표지가 헐렁헐렁 떨어져 가는 40여 년 전 엄마의 일기장을 딸들이 발견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늦게까지 그 옛날 비밀스러운 사생활이 그대로 들어있는 꾸밈없는 엄마의 사춘기를 훔쳐보며 킥킥대며 읽고 또 읽는다. 딸들은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묻고 싶고, 궁금한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단다.

"엄마의 첫사랑 그 소년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사느냐? 학교 앞에서 삐약거리는 노란 병아리를 사 놓고 외할머니께 혼날까, 친구 집에서 키웠던 그 병아리가 얼만큼 자랐었느냐?" 고물고물 쏟아 내는 딸들의 질문에 내 마음도 덩달아 추억의 실을 뽑아 그리움의 그림을 하나씩 그려내는 시간이었다. 반세기를 훌쩍 넘겨버린 나이든 엄마와 현재의 딸들이 일기장을 통해 마음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된 것이다. 아이들과 같은 눈높이와 같은 마음으로 단숨에 추억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다.

엄마의 일기장 그것은 철없는 아이가 일기를 쓰며 소녀의 모습으로 성장해 가는 한 편의 자서전과 같다. 예쁜 일기장을 사주시며 "기쁜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때론 멋진 말이나 책을 읽다 감동받은 특별한 글이나, 교훈적인 이야기도 쓰고 또 쓰도록 해라."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아는 기쁨과, 생각하고 느낀 것은 반드시 노트에 기록하게 하셨던 친정아버지의 가정교육은 신문읽기와 일기 쓰기였다. 메모하며 종이에 쓰는 소소한 기록의 힘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이다.

인생에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다잡는 중요한 것이 기록이다. 흘러가는 생각을 놓치지 않고 붙들어 매기 위해 오늘도 가방 속에 한 권의 책과 메모장을 꼭 가지고 다닌다. 기록의 힘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그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기쁨을 준다. 흑백 필름의 따듯한 영상을 돌려보며 잊었던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리고 저절로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추억여행을 선물해 주는 것이다.

설거지하는 등 뒤로 슬며시 어깨를 감싸는 다정한 목소리, "엄마의 일기장은 성공작이야. 백 마디 말보다 훨씬 더 강력한 살아있는 교과서임이 틀림없어."

이경영 수필가<br>
이경영 수필가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