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거실에 한 귀퉁이에서 반가부좌를 틀고 면벽 수행 중인 늙은 호박을 바라본다.

늘 나의 안위를 살피시는 선배님이 내게 늘 하시는 말씀이 "허우대는 멀쩡해가지고 몸은 무른 호박 같으니…" 이 말은 야무지지 못하고 겉모습만 그럴싸하다는 말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걱정과 염려를 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마음마저 부실하다는 것 같아 서운할 때도 있다.

못생겼다고 부르는 호박은 억울하다. 사실, 호박만큼 다이어트와 피부미용에 도움이 되는 채소는 드물다. 껍질부터 과육, 씨까지 영양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있다. 애호박, 중간 호박, 늙은 호박, 어느 것은 나물이 되고 어느 것은 약이 되고, 떡이 된다. 호박씨는 또 얼마나 많은 성분으로 음덕을 쌓는가, 사람의 간을 보호해주고 기침이 심할 때 구워 꿀과 먹으면 효과가 있다. 남성에게도 호박씨는 전립선을 튼튼하게 해주지 않는가,

찬바람과 함께 기온이 뚝 떨어지는 이맘때면 어머니는 호박범벅을 끓이셨다. 호박범벅 한 그릇으로 가족 건강을 지키고, 이웃들과 정을 나누었던 그 시절, 날씨는 쌀쌀했지만 마음은 훈훈했다.

미국의 핼러윈을 생각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도 바로 늙은 호박이다. 핼러윈이 되면 각 가정에서 늙은 호박으로 '잭 오 랜턴'이라는 등을 만든다. 속을 파낸 큰 호박에 도깨비의 얼굴을 새기고, 안에 초를 넣어 도깨비 눈처럼 번쩍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등이다.

잭 오 랜턴의 근원 설화의 주인공은 아일랜드의 인색한 잭으로, 술수에 능한 술꾼이었다. 어느 날 그는 악마와 내기를 하였는데, 이때 악마를 속이면서 자기가 죽은 다음에 지옥으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잭이 죽고 나서 보니까 생전에 지은 죄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고, 악마의 약속 때문에 지옥에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영원히 떠도는 저주를 받게 되었다. 추운 날씨 속에서 암흑을 방황하게 되었고 너무 추운 나머지 악마에게 사정하여 숯을 얻어 순무 속에 넣고 난로를 만들어 온기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순무보다는 호박의 속을 파내고 안에 등불을 넣어 놓는 잭 오 랜턴의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자고로 인생도 호박같이 넉넉하고 둥글둥글하게 살아야 저승에 가서도 편한 법이다.

호박도 사람처럼 관상이 있다. 색이 연하고 윤기가 없는 늙은 호박은 수분만 많아 오래 저장하기 어렵고, 덩치만 커다랗고 속 빈 강정처럼 겉만 멀쩡한 것이 있는가 하면, 울퉁불퉁 흘러내린 뱃살같이 굴곡이 심하게 불균형을 이룬 것도 있다. 탐스러운 호박은 옹골찬 주름과 담홍색을 띠며 단단한 육질과 묵직한 무게감도 있고 크기도 적당히 커야 한다.

과일도 고기도 적당히 숙성시켜야 제 맛을 내듯이 호박도 숙성과정을 거쳐야 제 역할을 한다. 연한 꼭지가 바짝 말라 강하고 질겨질 무렵이면 몸통에서 뽀얀 가루분이 나면서 단맛도 깊어진다. 그렇게 숙성과정을 거친 호박은 갖가지 양분을 몸 안에 저장하고 간택을 기다린다.

사람도 그렇다. 설익은 패기만 믿고 대책 없이 세상에 부딪히다간 외면당하기에 십상이다. 스스로 다지고 삭히고 성찰해야 세상과 화합 할 수 있다. 손톱만 한 작은 씨앗이 바윗덩이만한 결실을 보기까지의 과정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호박 같은 품을 느낄 수 있고, 가질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연말이 되길 바란다.

김민정 수필가
김민정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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