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계 곳곳에서 테러나 전쟁 또는 굶주림과 각종 사건사고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대문 밖이 저승이라 했던가. 험한 세상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같다. 죽음이란 이렇듯 우리의 삶의 한 편에서 늘상 같이하고 있는 것일까.

죽음이 이처럼 인간의 삶의 한 과정이라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떠한 죽음이라도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며 또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슬픔과 함께 때론 분노를 갖게도 한다.

대문 밖이 저승인 것은 동·서가 다를 바가 없다. 집을 나선 영국시민들이 출근길에 당한 테러가 그렇고 우리의 아픈 기억이지만 대구지하철화재사건도 그랬다. 이뿐인가 이 시간에도 집을 나선 많은 사람들이 온갖 이유로 어디선가 죽음을 당하고 있잖은가.

이같은 죽음의 의학적 정의는 이렇다. 심장의 고동이 15분 이상 정지한 상태나 인공호흡이 끝난 후 5분이 지나도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 또는 뇌파를 기록하는 기계가 둘 이상 5분간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이거나 최후로 의사가 죽음을 증명할 때이다.

이러한 의학적 죽음의 정의는 신체적인 면에서의 죽음을 말하기에 심장이 뛰고 있으면 건강하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세상에는 왼쪽가슴에서 고동치는 심장과 함께 ‘돈’이라는 혈맥을 움직이고 있는 황금의 심장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멈추면 인간은 죽는다.

황금의 심장이 멈춘다는 것은 곧 경제적 죽음을 말한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경제적 죽음이란 어떨때일까.

아마도 그것은 실직상태가 1년 이상 계속될 때 또는 은행부도를 낸 상태거나 돈을 빌려줄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때와 파산선고를 받았을 때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는 돈 없으면 죽고마는 냉혹한 사회이기에 의학적 죽음보다는 경제적 죽음이 더욱 고통스럽다는 것을 절감케 하고 있다.

의학적인 죽음은 또다른 죽음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적인 죽음은 또다른 죽음을 동반하고 있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빚에 쪼들리던 가장이 가족과 함께 목숨을 끊거나 전기가 끊긴 집에서 촛불로 생활하다 화재로 숨진 어느 소녀의 가엾은 죽음 등등이 그렇다.

불황의 터널 끝이 보이지 않는 서민들의 삶을 외면하기로 작심한 듯. 참여정부는 물론 정치권도 우리사회의 경제적 죽음을 예방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고 있다.

대통령은 “어느 분야도 옛날보다 후퇴한 곳이 없다”고 말했으나 서민들은 오늘 하루라도 살아남기 위해선 낡은 허리띠에 구멍을 하나 둘씩 더 뚫어야만 한다. 대문 밖이 저승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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