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필체·기자정신 바탕 역사의 기록자로 남아야"

중부매일 창간 멤버로 입사해 20년간 근무했던 조혁연 전 문화체육부장(현 충북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이 언론 밖에서 바라본 언론 등 후배들에게 조언을 전하고 있다. /김용수
중부매일 창간 멤버로 입사해 20년간 근무했던 조혁연 전 문화체육부장(현 충북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이 언론 밖에서 바라본 언론 등 후배들에게 조언을 전하고 있다. /김용수

[중부매일 이지효 기자] 중부매일이 창간 30주년을 맞아 '지역과 통하다'를 아젠다로 정했다. 이와 관련 '선배와 통하다'라는 코너로 중부매일 창간 멤버로 입사해 20년간 이곳에서 몸담았던 전 조혁연 문화체육부장(58·현 충북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 이하 조 교수)을 만났다. 조 교수를 만나 요즘 근황과 언론 밖에서 바라본 언론, 후배들에게 해주는 조언을 들어봤다. 그는 자기만의 필체를 갖고 기자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편집자

조 교수는 1989년 10월 중부매일 경력기자 막내로 입사했다. 청주대학교(81학번)를 졸업한 그는 원래부터 관심 있었던 언론사(신문)로 진로를 결정했고 1989년 1월 전북도민일보에 입사했다. 이후 고향에 신문사가 생긴다는 소식에 중부매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중부매일 배 전국대회까지 있을 정도로 '바둑'이 인기였다. 조 교수는 당시 바둑 기고란과 해설을 맡았었다. 3~4년 후 바둑란이 점차 사라지긴 했지만 그전까지 각 신문사에서 모두 다뤘던 것이 바둑이었다.

편집부, 문화부, 사회부, 정치부, 편집부국장·경영기획국장까지 두루 역임한 조 교수는 '문화통'으로 통했다.

문화부를 출입하면서 대학원까지 진학해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서 '고고학 저널리즘'으로 2010년 석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이왕 시작한거 부딪혀보자'라는 의지로 그해 충북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까지 밟아 '조선시대 교통로'로 2015년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충북대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중부매일 설립 초창기때만 해도 200명이 넘는 직원들이 함께 했고 집에 가는 시간조차 아까워 동료들과 밤을 지새며 신문이 나오기를 고대하며 기다린 시간들도 많았다. 그러나 1997년 IMF가 터지면서 직원들 절반 이상 구조조정 됐고 어려운 시기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언론 밖에서 언론을 바라보는 조 교수는 "세계 신문의 위기가 한국 신문의 위기고 그것이 곧 지방신문의 위기이지만 그래도 신문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급변하는 언론 환경에서 그 누가 답을 찾을 것인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 교수가 언론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1996년 옥천군 청성면 장연리에서 발굴한 국군 유해 2구가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옮겨지면서 그것을 계기로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로 이어진 것이라고 했다.

"1996년은 결혼하고 아내가 아들을 임신했을 시절이었어요. 취재를 하면서 전사자의 뼈와 유해들을 만지고 집에 들어갈때는 소금을 뿌리고 갔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조 교수는 "그때 당시에는 기자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던 것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언론 보도를 통해 발굴한 국군 전사자들의 유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유해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 '언론이 해야할 역할이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회상했다.

조 교수는 후배 기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잊지 않았다.

첫째, 기자는 자기만의 문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기자 이름을 가리고 기사를 읽었을 때 '누구의 기사다'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자기만의 문체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저는 고3때 작가 이상(李箱)의 작품을 접하고 신문기자에 대한 꿈을 키웠습니다. 이상의 단편소설이나 수필을 보면 단문이면서 접속사를 잘 쓰지 않지요. 문체가 스피드 있으면서도 우리나라 글이 이렇게 머리속에 쏙쏙 들어오나 싶을 정도로 매력이 있지요. 기자 지망생이나 후배들에게 이상의 작품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둘째, 기자정신이다.

조 교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초가 된 '사초'를 쓴 조선시대 '사관'을 예로 들며 기자들에게 '사관의 정신'으로 돌아가 '기자정신'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그는 조선 태종때 일어난 모든 사실을 기록한 '민인생(閔麟生)'사관과 선조때 사초를 버리고 도망간 '조존세(趙存世)' 사관, 정조 시절 사도세자의 죽음을 끝까지 지켰던 '임덕제(林德)' 사관을 예로 들었다.

지금 신문기자들이 하는 일이 그날의 일을 기사와 사진으로 남기는 역사의 기록자로서 '기자는 현대판 사관'이라고 밝혔다. 그는 역사의 기록자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고 했다.

후배기자들에게 안타까운점도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는 "언론의 힘은 특종에서 나오는데 요즘에는 기사를 동시에 쓰다보니 특종이 없어졌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작은 기사를 써도 기사에 대한 설계도가 필요하다"며 "설계도가 없으면 겁이나는게 당연하다. 설계도 훈련이 돼 있어야 하는데 카피나 하려고 하는 현상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조 교수는 "이런 현상을 없애기 위해서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잘 가르쳐줘야 하고 후배들 또한 기자정신으로 잘 훈련돼 어떤 일이 일어나도 헤매지 않을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보은과 충주의 헷갈리는 행정지명을 바꾸기도 했으며 청주 무심천에서 발굴된 고려 금속공예유물인 사뇌사 관련 보도도 처음 기사화 한 인물이다. 이를 바탕으로 1999년부터 2019년까지 20년을 이어온 청주공예비엔날레의 개최 배경이 되기도 했다. 현재 청주예술의전당 광장에 세워진 용두사지 철당간 복각품도 기사를 통해 이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해 시에서 수용한 사례다. '청주예술의전당'이라는 이름도 논란 끝에 '문화회관'이 아닌 '예술의전당'으로 결정된 것도 그의 기사를 통해서였다.

그는 조선시대 영·정조가 당쟁을 해소하기 위해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한 정책이었던 '탕평책'을 말하며 '지극히 넓은 포용력으로 모든 직원에게 공평해야 한다'며 중부매일의 장점이자 강점인 '인화(人和)'를 잊지 말기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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