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일 칼럼] 최동일 논설실장

새해를 맞으면 대통령은 그해 국정지표와 주요 과제를 신년사를 통해 발표한다. 얼마전 문재인 대통령도 새롭게 시작되는 2020년 경자년에 여러 의미를 부여했다. 남북간 평화통일 의지를 다지는 공동행사 개최, 국내 일자리 회복세 뚜렷, 부동산 시장 안정화 의지 등 좋은 말이 넘쳤다. 듣기에도 좋고, 성사된다면 더 바랄나위가 없는 희망이 가득한 메시지였다. 그런데 다 듣고난 뒤에 밀려드는 허망함은 왜일까. 흡사 일장춘몽에 취해있다가 선잠에서 깨어난 뒤 밀려드는 허무함처럼 씁쓸한 뒷맛은 왜일까. 모든 것이 꿈결에 일어난 듯 말이다.

문 대통령의 신년사가 단순히 아쉬움을 넘어 우려스러움을 자아내게 한 원인은 현실과 동떨어진 말잔치였다. 남북문제를 비롯해 일자리, 부동산 등 신년사를 채웠던 주요 현안들의 현실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실제와 동떨어진 진단으로는 올바른 처방을 내릴 수 없다. 어떤 이유에선지 국민들이 공감할 수 없는 진단과 처방을 내린 것인데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사탕발림만 한 셈이다. 그런 까닭에 희망과는 결이 다른 헛된 애드벌룬만 띄워 결국 국민들을 현혹하는 감언이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실체가 없는 달콤함은 환각(幻覺)일 뿐이다.

게다가 정작 다뤄야 할, 국민들에게 들려줬어야 할 말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비핵화를 포함해 답이 없는 대북문제는 이번에도 일방적인 구애(求愛)의 목소리만 높였다. 30~40대 실업자 및 초단기 취업자와 청년체감실업률이 급증하는 일자리는 회복세가 뚜렷하다는 유체이탈 화법으로 설명했다. 역대 최악의 성적표를 보이는 부동산은 정책 부작용에 대한 지적에도 '마이웨이'를 고집했다. 반면 이들을 비롯한 국가 현안의 근본적·장기적 해법이자 국가미래를 위해 반드시 가야 할 국가균형발전은 올해 신년사에서 딱 한번 거론됐다. 그것도 앞으로 추진될 사업을 치적삼아 내놓은 것 뿐이다.

지역을 넘어 국가적 위기를 상징하는 '수도권 인구비중 50%'의 벽이 지난해 뚫렸지만 아무런 대책도, 언급도 없었다. 대선에서의 약속을 넘어 정부의 의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가는 상황을 '나몰라라'한 것이다. 밑빠진 독이나 다름없는 일자리 보조금과 지역의 역량을 높이는 지원금 가운데 무엇이 더 국가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는지 삼척동자도 안다. 5년, 10년까지 갈 것도 없이 보조금이 중단되는 그 순간 결론을 분명해진다. 집권 절반을 넘기는 이 시점에서라도 대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미래를 얘기하지만 준비 없는 내일은 먹구름만 가득하다.

지난해말 한 방송에서 수년전 개봉됐던 '수상한 고객들'이란 영화를 방영했다. 고객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곤경에 처한 한 보험판매원이 자신의 잘못을 감언이설로 덮으려다가 엉뚱한 결말을 맺게 된다는 코미디 영화다. 주연을 맡았던 류승범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주인공이 진정성을 찾는 과정을 담아내면서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영화에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주인공의 감언이설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진심을 전하는 말로 바뀌는데 이 과정에서 희망이 담겨진다. 진정성이 있는 한 마디가 수 마디 감언이설보다 더 희망적인 것이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사람 관계에서 말은 중요하다. 듣기 좋은 말은 감미롭다. 그러나 달콤한 그 말에는 숨겨진 가시가 있다. 그래서 감언이설은 독이 된다. 실체를 감추거나 왜곡하고, 원하는 걸 보여주니 상대가 솔깃해 할 만한 것들로 채워지게 된다. 그렇다고 진실이 덮여지지는 않는다. 잠시 감출 수는 있어도 언젠가 드러나게 돼있다. 희망을 주고 싶다면 먼저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을 약속하고, 이해와 협조를 요구해야 가슴이 열린다. 귀만 여는 말로 이룰 수 있는 것은 말잔치 뿐이다.

최동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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