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우연은 놀라운 힘이 있다. 어느 순간 홀연히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곤 한다. '강우방의 눈, 조형 언어를 말하다 展'의 관람도 그랬다. 인사동을 걷다가 눈에 띄어 인사아트센터에 들어갔는데 그 다음의 나는 이전의 나와 무척 달라져 있었다. 저명한 미술사학자인 강우방 선생님의 강연이 다음날에 있다고 해서 또다시 참석해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문자가 없는 선사 시대. 300만년에 달하는 그 시대는 문자가 있는 시대 즉 역사 시대의 99%에 해당된다. 그 장구한 시간에도 문양이 있었다. 조형 언어이다. 그 신비한 언어는 암흑과 무지에 갇혀 있었다. 그런 요지로 강우방 선생님은 평생의 작업 속에 그에 대한 가능한 해석의 장으로 초대한다. 전시물들을 꼼꼼히 살펴본 나는 공감이 가고 있었다. 선사 시대 이래 무수하게 그려진 문양들에서 강 선생님은 공통점을 발견해 그것이 전개되는 패턴을 탐구해왔다고 보인다. 그 결과 조형 언어에도 문자 언어처럼 나름의 문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벽면 하나엔 '조형 언어의 기본'이라는 주제로 공통 문양이 가장 단순한 상태에서 복잡화, 구조화, 작품화 되어가는 과정이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었다. 바라보는 동안 납득이 가고 있었다. 나는 문양에는 거의 문외한이다. 벽화나 탑, 암각화, 불상 등에 관심이 있는 편이지만 그에 담기곤 하는 문양엔 그저그랬다. 당초무늬 등으로 문양의 의미를 설명하는 책을 볼 때도 확연히 와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럴만한 실력도 무기도 내게 없는 것이다. 이런 점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도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느끼게 되었다. 강우방 선생님은 그 전체에 도전해온 것이다. 송곳 같은 질문을 던지고 평생의 지고한 작업의 결과 색다르면서도 보편타당하게 여겨지는 해석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나는 졸저인 수필집 '수저를 떨어뜨려봐'에서 선사 시대의 도구들을 상상하면서 석기 시대로만 정의되는 현실에 불만을 토로했었다. 돌이 깎이고 다듬어지던 시대나 그 이전에 나무, 넝쿨, 잎, 흙 등 다양한 재료들 역시 도구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썩어 사라졌을뿐이다. 유물이 없기에 실증주의에 기반된 틀에선 채택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관을 벗어나 실체를 상상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시대를 나는 천연 도구 시대라 부르고 싶다. 나뭇가지, 넝쿨, 잎, 천연석, 단단한 열매 껍질, 흙, 모래, 조개 껍데기 같은 천연 도구와 이를 가공한 것들로 풍부했을 시대를. 목기류의 도구들이 풍부했음직하니 목기 시대라고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천연 도구들에 대한 상징을 녹색으로 간주해 녹색 시대라고 이름 지어도 좋다.' 수필집에 그렇게 적었다.

돌이나 깎고 다듬어 수렵을 하던 선사 시대인들에 대한 상상을 한껏 생동감 있고 실제에 가깝게 하는 효과를 주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주장은 그 정도일뿐 더 이상의 깊이로 나아가지 못했다. 강우방 선생님은 그런 나를 아득한 깊이로 밀어가는 한편 문양 곧 조형 언어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해주고 있었다. "당초무늬라는 말은 이제부터 머리 속에서 지우세요. 당초무늬가 아니라 영기(靈氣)예요. 고대인들은 영적인 기운을 그렇게 표현했어요."

당초무늬, 구름, 모란 등으로 현재의 잣대로 작위적으로 해석하는 병폐를 붕괴시키며 그 시대 고대인들의 염원, 느낌의 세계를 환기시켜주고 있었다. 문자가 없기에 사건은 알 수 없지만 사상은 알 수 있다. 그 말씀처럼 선사 시대가 가슴에 와닿게 하고 있었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 같다. 느껴지지 않던 것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의 이분법이 사라지고 죽은 과거와 편견에 빠진 현재 둘 다에 숨통이 트이는 사건이다. 역사 시대의 예술품들에도 선사 시대의 문양들이 섬뜩할 정도로 반복되고 있다. 그 이면마저 만져질 듯하게 하는 이 우연한 선물이 세렌디피티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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