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천 칼럼] 박종천 논설위원

전통적으로 언론은 사회의 '목탁' 또는 '소금'이라고 하고, '제4부'라고 불리기도 했다.

중국 노(魯)나라 때 새로운 법령을 발표할 때 목탁을 울려 사람을 모이게 했다. 여기서 목탁은 사회의 주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계도한다는 뜻을 가지게 됐고, 그런 역할을 하는 언론을 사회의 목탁이라고 한 것이다.

또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방지하듯이 언론은 사회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고발함으로써 사회가 부패되지 않고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에서 '소금'에 비유된다. 언론은 또한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크고, 그 결과 힘 있는 자들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에 이어 '제4부'라는 별칭을 얻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언론과 충북은 인연이 깊다.

근대사에서는 청주시 낭성면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걸출한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사학자로 우뚝 보인다.

신채호 선생은 정승 판서 집 자제들도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성균관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수재로 명성이 높았지만, 망국의 고급 관리가 되는 길을 버리고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는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대양보, 권업신문, 신대한 등의 신문에 주필로서 명 논설들을 써서 국민들을 계도하고 독립의식을 고취했다.

현대사에서는 충북 옥천 출신의 청암(靑巖) 송건호 선생이 '후배 기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언론인'으로 등장한다.

송건호 선생은 서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기도 전에 대한통신 기자로 언론계와 인연을 맺은 뒤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한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유신정권은 동아일보 기자 150여명을 하루아침에 강제 해직하는 언론탄압을 강행했고, 선생은 이에 대한 항의와 이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던졌다.

그 후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동시에 1986년에는 월간지 '말'을 창간해 전두환 군사정권의 보도지침 사건을 폭로했다.

또 1988년 독립적 언론인 '한겨레신문' 창간을 주도해 초대 사장을 역임했고, 그가 쓴 '해방전후사의 인식' '분단과 민족' 등은 1970년대 말~1980년대 대학생과 양심적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되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1운동 기념일인 3월 1일 충북 청주시에서는 '국민일보'가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의 지방신문으로 탄생한다.

이 국민일보가 '충청일보'의 전신이다.

이 신문은 1949년 1월 당시 충북도지사 윤하영의 공금유용과 독직사건을 폭로, '마(魔)의 복마전사건(伏魔殿事件)'으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고, 1989년에는 전국 최초로 기자들에 의한 편집국장 직선제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4년 노사 갈등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몇 년 후 다시 속간이 되었으나 아직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언론과 인연이 깊은 청주에서 1990년 본지(本紙) 중부매일이 탄생했고, 30주년 기념식을 며칠 전에 가졌다.

본지에 대하여 문재인 대통령은 "충북 최초 대조편집 시스템 도입, 충청권 첫 모바일 뉴스 제공과 베를리너판형 채택까지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지역 언론의 새 지평을 열었고, 지역 주민들의 삶에 밀착한 기획·탐사보도로 충청권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축전에서 평가했다.

이제 서른 살을 맞은 청년 언론 본지는 변화와 도전의 최일선에 설 것이며 충청권 미래를 위한 밀알이 되고, 촛불이 되고, 창구가 될 것을 다짐했다.

박종천 논설위원

필자도 1988년에 언론 생활을 시작했으니 같은 서른 살 언론인으로 다시 자신을 되돌아보고 또 다짐한다.

"자랑스러운 선배 언론인들만큼은 못 되겠지만,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첨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의 기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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