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박상준 논설고문

LG전자는 '글로벌 1등 가전' 기업이다. 이를 뒷받침한 CEO가 얼마전 용퇴한 조성진 전 부회장이다. 그는 세탁기의 장인으로 불린다. 43년간 재직하면서 '트롬' 브랜드를 세계시장에 알렸고 세계 최초의 '트윈워시'와 의류 관리기 '스타일러'도 그의 아이디어로 개발됐다. 하지만 그는 명문대 출신 엔지니어가 아니다. 공고를 졸업하고 LG의 전신인 금성사에 고졸기술자로 입사해 '고졸신화'를 썼다. 조성진 뿐만 아니라 이경재 오리온 사장, 포스코 광양제철소 임채식 공장장, 김영규 IBK투자증권 사장등도 고졸출신이다. 학력인플레이션이 만연한 나라에서 돋보이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제 2의 조성진이 나오긴 힘들다. 대졸자가 눈높이를 낮춰 고졸 일자리에 취업하는 '하향취업' 현상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발간된 한국은행의 BOK이슈노트에 따르면 대졸 취업자 하향취업률이 처음으로 30%대를 돌파했다. 최악의 '취업난'으로 고졸자들이 일하던 자리로 밀려나는 대졸자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일자리를 놓고 고졸자와 대졸자가 경쟁하는 구도가 됐다.

우리나라 대학진학률은 70%로 OECD국가의 평균보다 월등히 높다. 고학력 실업자가 양산되는 나라에서 학력인플레이션은 우리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다. 물론 대학진학률이 높으면 경제적 측면에선 큰 자산이다. 그 나라의 인적역량을 높일 수 있고 다양한 인재풀을 폭넓게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학벌인플레이션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대졸자는 많지만 사회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졸자들이 하향취업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고급 인력이 적정한 노동시장에 편입되지 못하면 국가적으로 큰 낭비다. 개인과 가정의 시간적·재정적 손실도 심각하다. 초·중·고 사교육비도 부담스럽지만 대학생 자녀를 둔 가정치고 빚 걱정 하지 않는 가정이 없을 만큼 학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반면 하향취업자는 박봉에 시달려야 한다. 2004~2018년 하향취업자의 평균임금은 177만원으로 적정취업자의 임금(284만원)보다 38% 낮았다. 대졸 임금프리미엄이 없기 때문이다.

하향취업자가 급증한 것은 본인 탓도 있지만 정부도 책임이 있다. 고교취업률이 높다면 굳이 대학을 갈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 정권 들어 고졸취업률이 낮아지면서 특성화고와 마이스터고에 대한 선호도가 하락하고 있다. 이 정권은 '고졸취업지원확대'를 100대 국정과제로 삼고 공기업과 민간기업들의 고졸채용을 유도하고 있지만 현실은 딴판이다. 특성화고 학생들의 실습시기와 실습기간의 조건이 나빠졌고 실습 교육비 명목의 정부지원금도 대폭 감소했다.

MB 정권 때 고졸취업 확대에 나선 것은 학력중심의 사회구조를 타파하고 인력 수요와 양성의 미스매치로 인한 구직·구인난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실력과 기술만 있다면 가방끈이 짧아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이 당시 정부의 의지였다. 하지만 고졸우대정책은 시들해졌다. 고졸취업 붐은 옛날이야기가 돼버렸다. 기업도 외면하고 공공기관도 고졸채용에 인색하다.

높은 대학진학률은 국가경제에 마이너스가 되고 있다. 대졸 과잉학력으로 인해 청년층의 노동시장 진입이 늦어지면서 2009년 이후 노동투입의 경제성장 기여도가 후진하고 있다. 고졸자 일자리 열악 → 대학진학 필수화 → 대학 과잉 진학 → 대졸자 하향취업 → 고졸자 취업기회 감소 및 열악한 일자리 취업' 이라는 심각한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더구나 경제정책 실패로 고용시장에서 방황하는 대졸자들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 대학진학이 개인의 미래소득보장과 더 나은 결혼조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투자행위로 인식되는 것은 퇴행적인 문화일 뿐 아니라 국가경제에도 도움이 안된다.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대학진학률이 40%를 밑도는 독일이 세계경제의 우등생이 된 비결중 하나는 현장 실습형 직업 교육을 통해 인력의 효율성은 높이고 인력 수급의 미스 매칭은 낮췄기 때문이다. 하향취업은 교육정책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다. 고졸학력으로도 실력을 갖추면 양질의 직장에 취업할 수 있다면 굳이 대학에 갈 이유가 없다. 정부가 고졸인재들을 위한 교육·고용 시스템을 개혁하지 않는 한 청년들의 고용환경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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