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대신 인두로 그리는 수묵화… '인고의 예술' 외길 50년

50여 년 낙화 외길인생을 걸어온 김영조 선생이 시연작업을 앞두고 환하게 웃고 있다. / 안성수
50여 년 낙화 외길인생을 걸어온 김영조 선생이 시연작업을 앞두고 환하게 웃고 있다. / 안성수

[중부매일 안성수 기자] 숯불에 달군 인두로 한지나 나무를 태워 그리는 '낙화'. 그 낙화가 결코 '잡기'가 아닌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충북 보은에서 묵묵히 외길을 걸어온 이가 있다. 50년 인고의 시간 끝에 국가무형문화재에 지정돼 낙화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낙화장' 김영조 장인을 만나봤다. / 편집자

숯불에 벌겋게 달궈진 인두를 양손에 쥐고 하얀 한지를 태워나가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진다. 은은한 갈색 톤이 먹색의 매력과는 다른 서민적인 따뜻함을 느껴지게 한다. 국가무형문화재 136호 낙화장 김영조 장인의 솜씨다.

50여 년 낙화 외길인생을 걸어온 김 선생은 '낙화'의 예술성을 알리기 위해 각종 국전에 출전, 끊임없는 작품 활동으로 주변의 인식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결과 지난 2010년 충북무형문화재 낙화장으로 지정됐다. 이후 3년에 걸친 철저한 검증을 통해 2018년 국가무형문화재 136호 낙화장으로 인정됐다. 김 선생이 걸어온 인고의 50여 년이 인정 받는 순간이었다. 낙화장 국가무형문화재는 문화재 중에서도 새롭게 지정된 분야로 보유자로는 김 선생이 국내 유일하다.

낙화장 김영조 선생이 시연을 하고 있다. / 안성수
낙화장 김영조 선생이 시연을 하고 있다. / 안성수

'낙화'란 불에 달군 인두를 이용해 종이나 비단, 나무 등 탈 수 있는 소재를 태워 그림이나 문양을 그리는 예술이다. 낙화기법은 전통 수묵화같은 전통회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수묵화에 나타나는 먹 농담을 인두로 지져서 표현해 낸다는 점이 독특한 점이다. 열과 인두의 강약에 따라 색이 검어지기도, 갈색을 띄기도 한다. 인두를 세워 선을 긋고 면으로 눌러 색칠을 하는 등 다양한 기법으로 그림을 표현할 수 있다.

"낙화는 오로지 한가지 색으로만 표현합니다. 인두와 불을 다루는 숙련된 손놀림과 미묘한 농담을 표현하는 기술이 중요합니다. 낙화는 전통 산수, 화조 등 동양화에서 다루는 소재를 모두 다룰 수 있어요. 나무를 태울 때 타는 질감이 퍼져나가면서 묵화같은 효과를 보이고 그 모습이 순수하고 담백한 매력이 있습니다."

국내엔 낙화 역사에 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없다. 학계에서는 500여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700년 전 중국에서 건너와 서민들과 부녀자 사이에서 널리 전파되다 1820년 박창규란 걸출한 장인의 등장으로 낙화가 크게 유행하게 된다.

"그 당시 사대부 집안에 낙화 병품 한점씩은 다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낙화의 얼마나 대단했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죠. 박창규란 인물은 추사 김정희와도 인연이 깊었습니다. 추사가 중국의 낙화 고수 무풍자와 겨뤄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명인이라 극찬했죠."

그러나 박창규 명인이 작고 후 밀양 박씨 가문에서만 가업으로 이어오면서 대중과 멀어지게 됐고 김 선생의 스승인 전창진 선생까지 가까스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던 것이다.

김영조 선생의 낙화 입문 계기는 거창하지 않았다. 20대 때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뒤 일자리를 찾던 중 우연히 신문지에서 본 '낙화수강생 모집, 취업도 가능' 광고가 그를 낙화의 세계로 이끌었다. 어려서부터 상상하고 보고 그리는걸 즐겨했던 그에게 인두로 지져 동양화, 산수화를 그리는 전창진 선생의 모습은 신세계였다.

낙화장 김영조 선생의 작업실. / 안성수
낙화장 김영조 선생의 작업실. / 안성수

"낙화가 그려지는 과정을 보고 '이거다. 난 이것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죠. 30평 남짓한 공간에 10개가 넘는 숯불을 피우고 그림을 그렸어요. 한여름엔 50도가 넘은 적도 있어요. 인내없인 절대 할 수 없었죠. 40명이 넘었던 수강생이 10명으로 줄었고 수강생이 줄어드니 결국 연구소도 문을 닫았어요."

남은 10여 명의 수강생들도 하나둘 떠났지만 김 선생은 낙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수년 간 익힌 기술로 각종 관광지에서 기념품을 제작해 판매했다. 기념품의 인기는 높았고 1979년 충북 보은군에 정착했다.

낙화를 그린지 십 수년 뒤, 전통 낙화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던 그는 잘 운영되던 기념품 가게를 정리하고 자신만의 낙화연구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낙화 작업에 집중했다.

"낙화라는 아름다운 예술이 기념품으로만 인식되는 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낙화가 '잡기'가 아닌 '예술'로 인정받기 위한 인고의 시간을 시작한 셈이죠."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10여 년간 작품을 만들며 홀로 자료수집, 학자들과의 교류, 연구 등에 몰두했다. 운보 김기창 화백과 '한국의 피카소' 장옥진 화백에게 극찬을 받으며 자신감도 올라갔다. 각종 국전, 전시회에 참여를 거부당하기도 했다. 예술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그럴때마다 그는 낙화를 세계적인 예술로 인정받아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그런 그에게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2007년 전승공예대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데 이어 4년 연속 입선 및 특선을 받았고 2010년 충북무형문화재에 지정되게 된다. 이 후 중국 상하이, 이탈리아 아솔로 비엔날레, 태국 동아시아문화도시 특별전 등 해외로 나가 많은 시연을 진행하며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2018년 국가무형문화재 136호에 지정했다. 국가에서 김영조 선생을 낙화장 보유자로 인정한 것이다.

"문화재위원회 자격 심의 등 검증 기간동안 벼랑 끝을 걷는 느낌이었어요. 한분이라도 반대를 하면 안되고 결격사유도 있어서는 안됐죠."

"국가무형문화재에 지정되니 이제야 우리의 것 '낙화'가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느낌입니다. 낙화는 이제 시작이죠. 발전이 무궁무진한 예술문화라고 생각해요. 한없이 높을 곳으로 갈 수 있고 그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도와주신 학자 및 관계자 분들게 진심으로 감사해요."

현재는 김영조 선생의 둘째 딸인 김유진씨가 김영조 선생의 뒤를 이어 낙화를 전수받고 있다.

미대를 나온 김유진씨는 부친의 솜씨를 물려받아 '대한민국 전승 공예대전' 문화재청장상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유진씨는 각고의 노력 끝에 충북무형문화재 전수조교까지 이르렀지만 김영조 선생이 국가무형문화재에 지정되면서 충북무형문화재 전수조교의 모든 혜택을 반납했다. 전수조교에 이르기가까진 10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과감히 포기한 것이다.

낙화장 김영조 선생이 낙화 전시실에서 낙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안성수
낙화장 김영조 선생이 낙화 전시실에서 낙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안성수

"둘째 딸이 어릴때부터 낙화에 관심이 많았어요. 본인이 하겠다고 자처하고 나섰어요. 그러나 낙화장의 길은 쉽지 않아요. 벽을 최소 100번 넘어야 합니다. 예술에는 지름길이 없어요. 사심없이 하나에만 몰두하고 정진하는 신념.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때론 냉혹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 딸을 위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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