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유창선 시인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세월 저편 철부지 어린 시절 뛰놀던 고향 생각이 난다. 친구들과 어울려 윷놀이, 연 날리기, 팽이치기, 쥐불놀이 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내 어릴 적 그때 그 시절은 왜 그리 춥고 눈이 많이 왔는지, 아마 지금은 지구에 온난화 때문에 덜 춥게 느껴지는 것도 있겠지만 그 당시는 가난했던 시절이라서 입고 먹는 것이 변변치 않아 더 춥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앞 냇가에 얼음이 꽁꽁 얼어붙으면 추위도 잊은 채 썰매타기, 팽이치기 등 놀이에 열중하다 얼음이 깨져 물에 빠지기도 했다. 시린 손발 녹이고 물에 빠진 양발 말린다고 논 밭둑에 불을 놓아 말리다 보면 양발은 물론이고 신발과 속내의까지 태워 부모님들께 꾸중 듣는 것도 다반사였다.

함박눈 내려 온 세상 햐앟게 덮혀 갈 때면 뒷동산에 올라 소나무 가지 꺾어 엉덩이에 깔고 앉자 눈밭 비탈길을 미끄럼 타고 내려오다 눈밭에서 나뒹굴기 일쑤였고, 온몸은 물에 젖은 생쥐 꼴에 손발이 꽁꽁 얼어도 마냥 즐겁고 신나기만 했다.

구정(설날)을 전후해서 날리던 연들을 정월 대보름날 저녁 무렵이면 하늘 눂이 날려놓고는 연줄을 끊어 멀리 날려 보내던 기억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연이 멀리멀리 날아가야만 그 해에 액운도 멀리 달아난다고 믿었기에.

이런저런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르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정월 대보름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해뜨기 전에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내 더위"하며 더위 팔러 다니던 일과 어머니께서 호두, 잣, 밤 등 견과류를 자식들에게 내어주시며 부름 깨물라 하셨던 일이 생각난다. 그래야만 일 년 내내 종기가 나지 않는다 하시던 말씀과 더불어.

오곡으로 밥을 짓고 다섯 가지나물에다 들기름 한 방울 떨어뜨려 커다란 바가지에 밥 비벼 형제들이 둘러앉자 함께 먹던 추억은 더없이 아름답다. 또한 대보름날 저녁이면 곱게 단장하신 후 장독대에 시루떡 해 놓으시고 촛불 켜고 정화수 떠 놓고는 자식들 건강과 온 가정이 화목하고 올 한 해도 편안하기를 간절히 비시던 내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저녁이 되면 온 동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앞산에 올라 떠오르는 둥근달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다. 온 대지에 어둑어둑 땅거미 내려앉을 녘에는 논둑 밭둑에 쥐불을 놓고 깡통으로 만든 쥐불놀이 통에 불붙은 장작 넣어 휘휘 돌리다 하늘 눂이 던지면 불꽃이 유성처럼 쏟아져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는 듯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날 밝은 뒤 입었던 옷들을 살펴보면 불똥이 튄 겉옷은 벌집처럼 숭숭 구멍이 나곤 했던 기억이 난다. 밤이 이슥해질 무렵 쥐불놀이와 윷놀이를 하다 각자에 집으로 뿔뿔이 헤어져 돌아가다 골목길 돌아설 때 허공에 환하게 떠있는 둥근 달빛 아래 내 그림자가 그때는 왜 그리 무서웠는지.

유창선 시인
유창선 시인

두 손 불끈 쥐고 달려 헐레벌떡 내 집 방 안으로 들어서면 언 몸 녹이라며 아랫목 내어주시고 화롯불에 군고구마 꺼내 주시고는 살포시 두 손으로 내 얼굴 감싸 안고 '내 새끼 많이 추웠구나' 하시며 꽁꽁 언 볼 녹여주시던 할머니의 그 모습, 그 사랑이 몹시도 그리워진다.

지금도 그 시절 그 모습들이 한없이 그립고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내 나이 들고 늙어감 때문만이 아니라 옛것이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깝고, 따뜻한 정이 갈수록 더 그리운 것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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