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사람이 살다 보면 정말 때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무리 뭔가를 하려고 해도 억지로 되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렇고, 자녀가 결혼하는 것도 그렇고, 공부를 하는 것도 그렇다. 들판의 나무가 봄이 되어야 꽃이 피는 것처럼 사람의 일도 그런 것 같다.

요즘 시절인연이란 말을 자주 떠올린다. 10년 전에 입적하신 법정스님이 애용했던 말이다. 무소유의 작가로 유명한 법정스님은 글에서 시절인연을 자주 언급했다. 세상에 빚을 남기고 싶지 않다며, 자신이 쓴 책을 죽은 후에 출판하지 말라고 유언까지 했던 분이다. 이제 시절인연이 다했으니, 모든 걸 내려놓겠다는 뜻이었을 게다.

시절인연, 이는 세상사 모든 것이 때가 있다는 뜻이다. 중국 명나라 말기 주굉 선사가 쓴 책인 '선관책진'에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자연히 부딪혀 깨쳐서 소리가 나듯, 척척 들어맞으며 곧장 깨어나 나가게 된다."라는 글귀에서 유래한다. 모든 것은 인연으로 이루어진다. 인연에서 인은 직접적인 원인을 말하고, 연은 조건으로서 간접적인 원인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 알의 씨앗이 있다고 치자. 여기서 씨앗은 직접적인 원인이고, 흙이나 물은 간접적인 원인이다. 두 가지 원인이 딱 들어맞아야 싹이 튼다. 인연의 법칙은 예외가 없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인과 연이 결합해야 생기고 일어난다.

내가 신미 대사와 맞닥뜨린 것은 순전히 시절인연의 결과다. 최근 신미 대사를 공부한 끝에 논문을 써서 '충북학' 21집에 게재했다. 이른바, '맥락적 근거 제시를 통한 신미 대사의 한글 창제 가능성 고찰'이다. 나로서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논문이 실린 충북학은 충북학연구소에서 매년 펴내는 지역 학술지다. 이런 학술지가 있다는 것도 누군가 알려주어서 알았다. 이것도 시절인연의 소치다.

난 글을 쓰면서 가끔 아찔함을 느낀다. 만일 우리글, 한글이 없었다면? 이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 말을 어떻게 쓰고 있을까. 여전히 한자를 쓰고 있겠지. 아, 아니야. 영어를 쓰고 있을지도 몰라. 그때는 중국을 섬겼기에 한자를 써야 했고, 지금은 미국을 좋아하니 영어를 쓰고 있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괜히 작아지고 자존심까지 무너져 내린다. 근데 한자가 얼마나 어렵나. 영어? 영어는 더 어렵다. 내가 모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영어를 배워보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아직도 영어가 되지 않는다.

때는 바야흐로 15세기, 유럽에서는 구텐베르크가 그제야 금속활자를 만들어 42행 성서를 인쇄할 즈음이다. 조선 초기에 세종과 신미가 있었으니, 이 두 분의 미스터리가 참으로 묘하다. 세종은 그 중요한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1443년 한 해의 끝자락인 12월 30일에 문득 발표한다. 내가 이달에 새로운 문자 28자를 만들었노라고. 그리고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뭔가 잘려나간 듯하다. 반포는 3년 뒤인 1446년에 가서 이루어진다. 깜깜도 그런 깜깜이가 없다. 훈민정음은 과연 어떻게 태어났을까? 세종 혼자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아무리 천재라도 그 어려운 문자를 어떻게 혼자.

이것이 늘 의문이었다. 한글을 그렇게 사랑하고 세종대왕을 누구보다도 흠모하는 나인데, 이것만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도와준 사람이 있다. 바로 그 사람은 신미 대사다. 마침, 영화까지 등장하여 신미 대사를 알렸으니 이런 시절인연이 어디 있겠는가!

신미는 명문 사대부 출신으로 본명이 김수성이다. 고향은 충북 영동이다. 집현전 학사이면서 세종이 총애했던 김수온의 친형이기도 하다.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 대사의 제자인 함허에게 출가한 후, 속리산 복천사로 내려와 주역과 대장경 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 범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했다. 당대 최고의 학승이자 언어학자로서 세종과 긴밀히 소통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은 백성을 위해 새로운 문자를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문자라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중국의 눈치도 보아야 하고, 유신들이 반대할 것도 뻔했다. 세종은 결단을 내린다. 바로 유·불의 융합이다. 누구보다 억불숭유 정책을 편 세종이지만, 불교에 기대기로 마음먹는다. 백성의 정서는 아직 불교였기에. 더구나 두 왕자와 소헌왕후를 잃으면서 불교에 더욱 의지했다. 이때 세종 곁에 있던 분이 신미다. 신미 입장에서는 불교를 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마다할 리가 없었다. 훈민정음은 유·불의 융합으로 탄생했다고 봐야 한다. 훈민정음 창제 후 처음 펴낸 책이 불경이고, 해례본에는 곳곳에 불교의 법수가 박혀 있다.

그렇다. 내가 신미를 맞닥뜨린 것이나, 세종이 당시 신미를 만난 것이나 모두가 시절인연의 소치다. 훈민정음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지금 다시 한글로 살아난 것도 다 시절인연이다. 훈민정음, 아니 한글은 시린 겨울을 딛고 피어난 화려한 봄꽃이다.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프로필

▶2006년 월간 문예사조 수필 등단
▶CJB 청주방송 제5회 TV백일장 수필 장원
▶한국문인협회·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청주문인협회 부회장
▶저서 '청소년을 위한 명상 이야기', '학교로 간 붓다', '소똥 줍는 아이들', '내가 묻고 붓다가 답하다', 수필집 '삶을 일깨우는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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