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토종에 대한 워크샵이 경기도 수원의 서호 곁에 위치한 농민회관에서 있었다. 이날의 주제는 쌀이다. 쌀과 밀로 구분되는 동서양 문화 차이에 대한 짧은 설명이 먼저 있었다. 쌀로 들어선 현미, 백미 등의 분류에 이어 멥쌀과 찹쌀로 흘렀다. 녹말의 주요 성분으로 아밀로스와 아밀로펙틴이 있으며 그 둘의 구성 비율에 따라 멥쌀과 찹쌀로 나뉜다는 말을 들었을 땐 고교 때의 화학, 생물 시간이 어른거렸다. 쌀 하나의 세계가 과학의 밀집임과 동시에 점점 화엄경처럼 여겨져갔다.

모니터 화면엔 쌀이 확대되어 있었다. 지금껏 쌀 한 톨을 깊게 들여다보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자각 속에 화면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동의보감, 임원경제지의 본리지와 정조지에 나오는 토종쌀에 대한 발표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 여운이 뒤따랐다. 워크샵이 끝나고 귀가하자마자 쌀 푸대에서 쌀 한 줌을 쥐었다. 그 중 한 톨을 손바닥에 놓고 보았다. 검정 도화지를 찾아내 그 위에 올려놓고 스마트폰 카메라로 계란 절반 정도의 크기로 찍었다.

'쌀 한 알을 바라봅니다. 지금껏 책들을 보고, 신문도 가끔 보고, 페북글도 봐왔지만 쌀 한 톨을 정성껏 본 적 없습니다. 밥을 먹고, 떡을 먹고, 미음, 죽, 숭늉, 누룽지도 먹었지만 쌀 한 톨을 제대로 본 적 없습니다. 논을 바라보고 모내기, 추수도 해보고 농업 혁명, 산업 혁명, 정보 혁명으로 인류사를 나누는 글도 읽고 농업 혁명 앞에 인지 혁명을 첨가하는 유발 하라리의 글을 접했어도 그랬습니다. 김제 평야, 철원 평야를 바라보고 모판, 못줄, 낫, 홀태, 방앗간, 쌀 창고를 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대학원까지 나왔어도 그런 말 해준 학교 하나, 선생님 한 분 없었습니다. 쌀 한 톨을 바라봅니다. 물리학자의 눈으로. 화학자의 눈으로. 생물학자의 눈으로. 인류학자의 눈으로. 농부의 눈으로. 명상가의 눈으로. 화가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으로 페이스북에 포스팅했다. 농업 혁명, 산업 혁명, 정보 혁명의 셋으로 인류사가 나뉘든 유발 하라리의 말대로 넷으로 나뉘든 근간을 이루는 것은 먹고 사는 일이다. 시대별로 먹는 대상과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인간은 생겨남과 동시에 수렵을 하든 농사를 짓든 산업 시대나 정보 시대에 걸쳐 유통 시장에서 식재료들을 구해 해먹든 사먹든 해왔다. 날 것으로 먹든 불에 구워 먹든 오븐이나 렌지 등등에 익혀 먹든 했는데 그 차이는 크게 보면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날 것과 익힌 것의 범주 안에 들어온다.

동양 사상과 한의학에선 '정기신(精氣神)'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 바탕을 정(精)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도 쌀(米)이 들어간다. 쌀이 정의 근간을 이루고 그것이 기로 생(生)하며 신으로 거듭 생(生)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쌀로 상징되는 음식이 없으면 신을 이루기는 커녕 인간으로서의 유기적 시스템이 기초부터 붕괴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욱이 기(氣)에도 쌀(米)이 들어있다. 정기신에서 적어도 2/3의 근간을 이룰 정도로 쌀이 중요한 것이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이러한 쌀은 불과 물과 도구와 노동의 조합으로 밥이 된다. 서양으로 치면 빵이다. 인류사의 근간이 되고 한 사람으로 쳐도 정기신의 기초를 이루는 음식. 먹거리와 식당 등 음식 관련 문화가 주변에 넘쳐나는데 그 흔한 음식 하나 먹지 못해 삶의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들이 세상 곳곳에 즐비하다. 슬픔과 분노, 안타까움을 넘어 세계 구조에 대한 반성적 사유와 더불어 올바른 실천 역시 무수히 반복된 말이겠지만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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