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옥 수필가

사람들은 누구나 좋아하는 책 한두 권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낡고 낡아서 표지가 너덜해지거나 종이가 누렇게 바래 활자를 제대로 읽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하고 애장하고 있는 책 말이다. 나도 그렇다.

사춘기 시절 막연히 좋아했던 이성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책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책의 첫 페이지에 쓰여 진 한 줄의 메모 때문이었는지는 더 모르겠다.

'어린이의 눈을 사랑하라. 어린이의 맑디맑은 정신을 사랑하라.'

중2 학생이 읽기에는 어려운 책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 책을 오랜 기간에 거쳐 꽤 여러 차례 읽었고, 차츰 나이가 들면서 나름 책 내용을 이해해 나갔다. 지구를 포함한 일곱 개의 별들에 살고 있는 어른들의 모습은 적어도 닮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다짐과는 달리 나는 권위적이며,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으며, 숫자 세기만을 좋아하고 누군가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어서 관계 맺고 길들이는 일을 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때때로 외로웠다. 자기가 길들인 장미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다하기 위해 노란 뱀에게 물려 자기 별 소행성 B612호로 돌아가는 어린 왕자는 지금도 나의 정신을 지탱해 주는 튼튼한 끈이기는 하다. 그렇다. 그 책은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이다.

특히 보아구렁이를 삼킨 코끼리를 그린 그림에 모두들 모자라고 답할 때 나는 보아구렁이를 소화시키고 있는 코끼리라고 답하는 어른이 될 거라고 생각 했었다. 모자처럼 보이는 그 겉모습 속에 존재하는 내면을 보는 어른이 되고자 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런 내 모습이 스스로 안타깝게 여겨질 때 나는 뿌리를 본다.

겨울이 시작될 즈음 지인으로부터 꽃가지 몇 줄기를 얻어왔다. 여름에 보라색 예쁜 꽃을 피운다는 루엘리아 꽃줄기다. 추워지는 날씨 속에 화분에 심기도 망설여져서 적당한 투명 꽃병 속에 담가두기로 했다. 며칠 후 꽃가지 줄기 끝에 하얀 실뿌리가 나더니 빠른 속도로 뿌리가 굵어지며 수많은 잔뿌리들이 자라났다. 줄기에 붙어있는 잎들도 색깔이 진해지고 무성해졌다.

모든 세상만물에는 뿌리가 있다. 어떠한 이유로든 뿌리가 없는 생명체는 없다. 뿌리로부터 시작해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물론 열매로 결실을 맺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모든 만물의 근원은 뿌리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 뿌리의 존재를 잊고 산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자체를 부정하기도 하고 어려운 일을 겪게 되면 좌절하고 흔들린다. 그래도 우리가 어려운 일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굳건히 우리를 지탱해주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고 힘들어도 살아갈 만한 이유는 보이지 않는 중요한 가치들이 우리들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인류의 최대 숙제였던 암 정복이 코앞인데 뜻하지 않은 감기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전 세계의 혼돈과 혼란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들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뿌리를 생각한다. 힘겹게 병마와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뿌리가 튼튼히 살아있다고, 힘내라고 말하고 싶다.

김영옥 수필가
김영옥 수필가

유난히 힘든 하루를 보낸 날이면 난 수경재배 속 뿌리를 본다. 눈으로 뿌리를 확인하고 힘을 얻는다. 뿌리를 보며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아름다운 가치들을 생각해본다. 그것들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어 아직 우리는 살만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뿌리는 '어린왕자'의 이야기를 여전히 나에게 들려주고 있다.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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