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조영의 수필가

충북도내 낮 최고기온이 영상 10도를 웃돌며 포근한 날씨가 이어진 13일 청주시 청원구 내덕동의 한 주택담장이 봄을 반기는 영춘화로 노랗게 물들었다. 영춘화는 잎보다 먼저 꽃이 펴 봄꽃 중에 개화시기가 빠른 편이며 개나리와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신동빈

아직은 봄이 멀리 있다고 생각했는데 '2월의 영춘화' 제목을 붙여 사진을 보내왔다. 한숨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은 k의 마음이다. 올해 첫 꽃소식인데 반가움보다는 겨울이 머뭇거리기만 하다 물러선 것 같아 허탈했다. 봄도 맞이하는 순서가 있다. 나는 소리에 민감하다. 얼음이 갈라지는 봄날의 저수지 포효, 새들의 지저귐은 맑고 높아지며 놀이터로 모인 아이들 소리가 가까이 들릴 때 봄을 느낀다. 그런데 불쑥 봄꽃이 피었다. 겨울도 순간 사라졌다.

사라진 겨울은 생태계 질서가 무너지고 농작물도 변화의 틈이 보인다. 지구촌 곳곳에서도 위험을 예고했다. 남극은 이상 고온으로 펭귄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겨울이 겨울다워야 하는 이유를 k도 간절했다. 사진 찍는 일에 한창 재미를 느끼는 중이라 지난겨울은 첫 경험이고 도전이었다. 눈 쌓인 청주 풍경을 찍고 싶어 했다. 기다리는 설렘은 곁에 있는 나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어떤 날은 내가 사진 찍을 것처럼 흥분되어 좋은 장소를 떠올렸다.

소박하지만 이야기가 있고, 시간의 더께로 소중한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자세히 보면 찾는다. 바쁘면 보지 못하는 아름다운 길도 몇 군데 알고 있다. 그곳 겨울이 k 렌즈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탄생할까 기대했다. 나도, k도 겨울은 희망이었다. 그런데 별 같이 노란 꽃잎으로 팽팽하게 당기던 긴장감이 풀렸다.

사진을 찍고 싶었던 적이 있다. 안동 하회마을 류성룡 생가에 갔을 때다. 대문을 들어서는데 대문턱 가운데가 움푹 파였고 가장자리보다 더 낡았다. 그곳을 류성룡 선생은 생의 위협과 맞서며 넘었고, 누구는 난분분한 세상의 소식을 전하며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여행자들이 넘나들고, 호기심에 들어온 사람의 기운으로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누구도 하찮고 낮은 대문턱에 관심을 두지 않아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지난 세월은 안내 표지판 숫자에서 찾았고 고택은 사실의 증거로 충분했다. 대문턱은 나 혼자 것이 되었다. 사진을 찍어두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본 기억을 되돌리는 일은 시각적인 것이 가장 빠르고 자극적이다.

아련한 시간의 진경을 보여주는 사진전 '학림다방 30년-젊은 날의 초상'을 개막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직접 가서 보지는 못했지만 소셜 미디어를 통해 본 전시회는 사진을 찍고 싶은 생각만 있는 게으름을 깨워주는 기사였다.

학림다방 주인이자 사진작가인 그는 늘 같은 장소, 안에서 밖의 풍경을 찍었다. 사진 속 현실은 '창문 너머로 흐른 시절들'이란 제목이 되었고, 밖에서 다방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시간이 흘러 '젊은 날의 초상' 제목이 붙는다. 기타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김광석 손끝, 송강호를 비롯한 풋풋했던 시절의 연예인들, 시인 김지하, 자연과 우리 것의 소중함을 깨워주는 윤구병 선생님 사진도 보인다.

공간은 주인을 닮고 주인 철학에 따라 사람들이 모인다. 세 개 카테고리 중 하나인 '학림다방' 전경이다. 빈자리에 공간을 채우며 앉았던 사람들 이야기는 전설로 남았다.

'학림다방 30년-젊은 날의 초상' 사진 중 어떻게 무엇을 누구를 기억하는가에 따라 추억하는 이야기는 각각이다. 나는 윤구병 선생님이 제일 반가웠다. '우리 순이 어디 가니' 그림책은 봄이면 제일 먼저 생각난다. 할아버지께 새참 갖다 드리러 가는 순이를 따라 가면 시골 봄 냄새가 온몸으로 스며든다. 냇가에서 보리밭에서 꽃길에서 순이와 만나는 풀, 나무, 동물들은 우리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겨울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k도 떠올렸다. 사진 속 풍경은 눈 오는 날이다. 나뭇가지에 눈이 쌓였고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걷는다. 그들이 지나간 뒤로 발자국이 선명하다. 겨울이지만 포근했으리라. 발자국 녹은 흔적이 보이는데 눈은 쌓이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이 눈송이처럼 나뭇가지에 걸려 빛난다. 사람들의 등도 따스하다. 지난겨울 눈이 내렸으면 비슷한 느낌의 사진을 찍었을 거로 생각했다.

"잘 찍은 사진도 아니고 유명 작가도 아니지만 30년이 지나고 보니 세월이 귀한 사진을 만들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나 모두가 귀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잘 봐야 한다. 바른 생각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즐겨야 한다.

k에게 어떻게 문자를 보낼까 고민하는데,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을 빌려 수상 소감을 한 말이 떠올랐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창의적이다"

두 사람의 말을 조금씩 모방하여 창의적이지 않은 답신을 보냈다. 영춘화를 본 것은 개인적이지만 '2월의 영춘화'를 본 것은 창의적입니다. 봄꽃 귀하게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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